고물가와 통화가치 폭락 등 심각한 경제난을 계기로 시작된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시위 진압을 위한 당국의 강경 대응 속에 인터넷과 국제전화까지 전면 차단되면서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인권운동가통신(HRANA)은 9일(현지시간) 지난해 12월 28일 시위가 시작된 이후 시민과 군경을 포함해 최소 62명이 숨졌다고 집계했다. 비정부기구 이란인권(IHR)도 어린이 8명을 포함해 시위대 45명이 사망했으며, 수백 명이 부상하고 약 2000명이 구금된 상태라고 밝혔다.
시위대에 대한 실탄 발포로 사망자가 대거 발생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테헤란의 한 의사는 미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수도 내 6개 병원에서만 최소 217명의 시위대가 실탄에 맞아 사망했다”며 “사망자 대부분은 젊은 층으로, 일부는 테헤란 북부의 한 경찰서 앞에서 보안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즉사했다”고 주장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이란 당국은 통신 차단이라는 강경 조치에 나섰다. 온라인 감시단체 넷블록스(NetBlocks)는 10일 “이란 정부가 시위 진압을 위해 인터넷을 전면 차단한 상태가 36시간째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넷블록스는 “시민들이 가족과 지인의 안부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넷블록스가 공개한 그래프에 따르면 이란 내 인터넷 트래픽은 지난 8일 오후부터 급격히 감소한 뒤 정상화되지 않고 있다.
이란 당국, 인터넷 전면 차단. 사진 넷블록스 엑스 캡처 [출처:중앙일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는 당국의 인터넷 차단 조치에 대해 “학살을 준비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며 “외부의 감시를 차단한 상태에서 진압 수위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AP통신 역시 과거 사례를 근거로 “통신 차단은 대체로 정부의 강도 높은 유혈 진압으로 이어졌다”고 우려했다. 영국 가디언은 “인터넷 차단은 시위 확산을 막는 동시에 탄압 현장을 외부가 목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라고 분석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국영 IRIB 방송 연설에서 시위대를 ‘폭도’ 또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일부 폭도들이 거리를 망치며 외국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며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란 혁명수비군(IRGC)도 성명을 통해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 진압 의지를 밝혔다.
국제사회도 이란 당국의 대응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정부가 과거처럼 국민을 살해하기 시작한다면 개입할 것”이라며 “이란이 가장 아픈 곳을 매우 강하게 때리겠다”고 경고했다. 프랑스·영국·독일 정상들도 공동성명을 통해 이란 당국의 자제와 인권 존중을 촉구했다.
이번 대규모 시위의 직접적인 발단은 경제난이다. 지난해 12월 이란의 물가는 전년 대비 24.4% 급등했고, 이란 리얄화 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여기에 중앙은행이 일부 수입업자에게만 유리했던 환율 정책을 폐지하고, 오는 3월 세금 인상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불만이 폭발했다. 시장(Bazaar) 상인들이 지난해 12월 28일 점포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선 것을 계기로 시위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이란 정부는 최근 국민 대다수에게 매달 7달러(약 1만200원)의 생활비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았지만, 고물가와 구조적인 경제 위기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강경 진압과 통신 차단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 사태가 더 큰 인권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