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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교회 잃은 '레바논의 기독교인들'...
전쟁의 포화 속 ‘가시관’의 부활절

토론토 중앙일보 편집팀 0
이스라엘-헤즈볼라 교전 격화로 남부 레바논 기독교인 수천 명 피란길... 베이루트 외곽서 성주간 맞이
레바논 인구 1/3 차지하는 기독교 공동체, 조상 대대로 지켜온 터전 버리고 '실향민' 신세로 전락
마로니트교회 총대주교, 이스라엘의 공격과 이란·헤즈볼라의 개입 양측 모두 강력 비판
[레바논의 한 교회의 기독교인들. 레바논은 이슬람과 더불어 기독교인 천주교와 정교, 개신교가 공존한다. Youtube @APT캡처]
[레바논의 한 교회의 기독교인들. 레바논은 이슬람과 더불어 기독교인 천주교와 정교, 개신교가 공존한다. Youtube @APT캡처]
(국제)
수년 동안 이스라엘 접경지인 남부 알마 알샤브 마을에서 부활절 강론을 집례했던 마룬 가파리 신부의 올해 성주간은 예년과 전혀 달랐다. 그는 고향 성당 대신 베이루트 외곽의 한 성당에서, 고향 성당의 모습을 본뜬 종이 모형 옆에서 설교를 이어갔다.

성당 대신 대피소에서, 모형 성당 옆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

지난달 이스라엘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간의 전면전 수준의 충돌이 발생한 이후, 레바논에서는 1,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만 명 넘는 피란민이 발생했다. 수세기 동안 비잔틴, 아랍, 오토만 제국을 거치며 신앙의 터전을 지켜온 레바논 기독교인들에게 이번 전쟁은 존재론적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중동의 진주에서 분쟁의 화약고로, 레바논이 걸어온 비극의 역사

과거 '중동의 파리'로 불리며 번영했던 레바논의 비극은 복잡한 종교적 인구 구성과 외부 세력의 개입에서 비롯되었다. 1943년 독립 당시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정교한 권력 분점 체제(National Pact)를 통해 안정을 유지했으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정치 세력화되면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레바논을 근거지로 삼으며 내부 갈등이 폭발했고, 이는 15년간 이어진 참혹한 내전(1975~1990)으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 인프라는 파괴되었고, 시리아와 이스라엘 등 주변국의 대리전 장으로 전락하며 경제는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오늘날 레바논의 파탄은 이슬람계 난민 수용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착화된 종교 파벌 정치의 부패와 비효율이 낳은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와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국가 기능의 마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번 이스라엘-헤즈볼라 간의 전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레바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다. 한때 아랍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과 민주주의 전통을 자랑했던 레바논 기독교 공동체가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는 모습은, 외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한 국가의 평화가 어떻게 철저히 해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

"교회가 곧 피란처"... 포격 속 마을 지키다 숨진 이들의 비극

이스라엘의 전면 대피 권고에도 불구하고 남부 마을을 지키던 기독교인들은 성당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버텼다. 하지만 지난 3월 8일, 자신의 정원을 돌보러 나갔던 70대 노인 사미 가파리가 이스라엘 드론 공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은 주민들은 결국 짐을 싸야 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도움으로 베이루트로 피신한 이들은 "전쟁은 파괴와 죽음 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며 절규했다. 레바논 마로니트교회의 베샤라 알라이 총대주교는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이란의 개입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가 절망적 상황에 놓였다"며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전통마저 빼앗긴 부활절, "고향의 종소리가 그립다"

부활절 전날인 성토요일에 조상의 묘를 찾는 전통도 올해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검은 옷을 입고 베이루트 세인트 앤서니 성당을 찾은 나빌라 파라는 "고향 집의 냄새와 세 성당의 종소리가 어우러지던 풍경이 너무나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부 사제들은 "고집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로서 남겠다"며 여전히 포격이 쏟아지는 남부 티레(Tyre) 등의 도시에 남아 문을 연 성당을 지키고 있지만, 식량과 구호물자 공급이 끊기면서 고립된 상태다. 교황청이 보낸 40톤 규모의 구호품 수송대마저 보안상의 이유로 회항하는 등 인도주의적 위기는 극에 달하고 있다.

고통받는 남부 성당들, 신앙으로 견디는 '십자가의 길'

베이루트 제이데이 지역의 도리 파야드 신부는 고난주간 미사에서 "오늘 여러분은 십자가의 의미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교우들을 위로했다. 성당 안은 피란 온 신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신부가 남부의 버려진 성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아람어의 방언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했던 언어인 시리아어로 기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이 유랑과 고통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중동의 마지막 기독교 보루, 레바논의 신앙이 흔들린다

레바논은 아랍 세계에서 기독교 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로, 다문화 공존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대리전은 레바논의 기독교 공동체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하고 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성당이 '침묵의 증인'이 되어 폐허로 남겨지는 현 상황은 종교적 비극을 넘어 중동의 문화적 다양성 자체가 소멸할 수 있다는 경고다. 국제 사회는 무력 충돌의 지정학적 득실을 따지기에 앞서, 수천 년간 평화를 지켜온 민간 공동체가 전쟁의 제물로 바쳐지는 비인도적 상황을 멈추기 위한 실질적 중재에 나서야 한다. 고향 성당의 종소리가 다시 울리지 않는 한, 레바논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절은 진정한 축제가 아닌 '십자가의 고난' 그 자체이다.

토론토 중앙일보 편집팀 (news@koreadailytoron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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