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와 스위티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토론토 중앙일보
국제 Pen 문학산책

곤지와 스위티

김채형 2025-02-21 0

곤지와 스위티는 우리 부부가 캐나다로 이주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키웠던 강아지들이다. 곤지는 요크셔테리어 종 암컷으로 동네의 동물병원에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입양했다. 스위티는 곤지를 입양한 이듬해 캘리포니아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들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고 온 포메라니언 암컷이었다. 두 마리 모두 몸무게가 2.3 킬로그램 정도로 작았다. 


스위티가 오자마자 곤지의 살벌한 텃새는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셈인 스위티에게는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전 주인에 대한 그리움과 곤지의 학대로 인한 설움의 시간이었다.

사실 곤지가 스위티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스위티가 오기 전까지 곤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세상 부러움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스위티가 온 뒤로 곤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엄마가 어디서 이상한 놈을 데리고 왔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항의하는 거 같았다. 스위티에게 사랑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얼굴 가득 어려 있었다. 

스위티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스위티의 생활용품을 미처 장만하지 못한 상태였다. 스위티를 데려오는 건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위티가 곤지의 이불을 덮고 나란히 자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무지였다.

스위티를 밀어내고 자기 이불을 빼앗아 가는 곤지의 행동은 진정 살벌했다. 곤지의 두 눈에는 스위티를 금세 죽이기라도 할 듯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어금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스위티는 자기와 같은 견이고 뭐고 없이 자기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일 뿐이었다.

스위티는 당당한 곤지의 태도에 기를 펴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구석으로 밀려 반항 한 번 못 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 뒤로 영역을 빼앗길까 마구 공격하는 곤지와 무단 침입자처럼 당하는 스위티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 모양이 불쌍해서 편이 되어 주어야 했고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엄마의 태도가 곤지는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엄마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스위티를 감싸는 게 영 못마땅한가 보았다. 내가 손을 뻗으면 대놓고 항의하듯 앙탈을 부렸다. 

날마다 전쟁이었다. 곤지는 틈만 나면 스위티에게 으르렁거리며 자기 둥지 근처는 얼씬도 못 하게 혼을 내곤 했다. 엄마가 안 보는 틈을 타 물어 뜯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라 식사 시간에는 어떡하든 스위티 사료를 빼앗아 먹고 간식도 스위티 것까지 앞에서 날름 채 먹기 일쑤였다. 

스위티는 곤지의 날쌘 행동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니까 저만치 떨어져 머뭇대다가 제 밥도 못 찾아 먹곤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먹을 것을 스위티의 입에다 넣어 주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스위티의 입에 들어가는 것도 날쌔게 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부부는 그저 기가 막혀서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곤지도 차츰 체념하는지 처음보다 나아지기는 했다. 가끔 장난감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고 스킨쉽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곤지의 마음 밑바탕에 깔린 스위티에 대한 근본적인 질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주는 간식을 앞에서 날름 채 먹고 내가 없을 때를 틈타 스위티의 다리를 물곤 했다. 심지어는 스위티를 챙기는 내게 삐져서 나를 밀어내고 멀리하기도 했다.

곤지와 스위티를 키우면서 나는 질투로 인해 미워하고 티격태격 싸우는 그들의 모습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보다 사랑과 관심을 더 받고 싶고, 맛있는 것도 더 먹고 싶다는 욕심이 닮아 있었다. 


인간도 남을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더 출세하고 더 갖고 싶은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지 않나. 성경 말씀에도 모든 죄악의 밑바탕에는 질투가 있고 질투가 죄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부부는 곤지가 끈질기게 드러내는 질투와 욕심과는 무관하게 진정으로 그들을 똑같이 사랑했다. 그럴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줄게’라고. 곤지의 스위티에 대한 부당한 괴롭힘과 그 서슬에 기를 못 펴는 스위티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차등이 없었다. 먹이를 주고 안아주고 데리고 나가 산책하고 돌보아주는 일에 공정했다. 

하느님 앞에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 강아지들을 돌보면서 이기심, 미움, 질투, 방탕, 탐욕, 거짓, 폭력 등으로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이런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떠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우리 부부는 가끔 그들의 사진을 꺼내 보며 잊지 못하고 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갑다고 길길이 뛰어오르던 모습, 우리 중 하나가 입원하거나 여행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출입문 앞에 앉아 밤새워 기다리던 모습, 기다리다가 중간중간 혹시나 들어왔나 싶은지 주인의 침대로 가 침대 위를 살피던 모습이 문득문득 현실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직도 그들이 그립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