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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믿음과 깨어 있음

전철희 2021-08-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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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믿음과 깨어 있음 


모 회사 중역으로 일하시던 분이 길을 가다가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 전문 의사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는 말, “요즘 흔치 않은 병인데…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성 늑막염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그분의 아내가 모 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라는 사실이다.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쓰러지신 그분은 아내 말을 충실히 따르는 애처가였다는 후문이 있었다. 커피의 효능을 구글에서 검색하니 제목이 여러 페이지를 걸쳐 나온다. 반대로 부작용을 검색하니 역시 제목만 여러 페이지가 넘는다. 세상 어느 음식이 몸에 좋기만 하거나 반대로 나쁘기만 하겠는가? 수억원에 사서 먹기도 하는 산삼도 과용하면 탈이 난다고 한다. 아는 것이 병이 된 셈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면서 정보 부족으로 인한 문제보다는 정보 과잉으로 인한 문제를 더 걱정하게 되었다. 군에서 근무할 때 교육받은 첩보와 정보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기억된다. 어느 한 곳의 적 진지에 있는 빨랫줄에서 빨래가 사라졌다는 것은 첩보. 이러한 첩보가 여러 개의 다른 적 진지에서도 수집된다는 것은 정보다. 즉 적이 이동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다.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우리가 과잉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군사 용어로 본다면 첩보 수준이 아닐까? 어느 한 가지만 놓고 판단할 수 없거나 실제로는 무가치 한 것일수도 있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첩보(첩보라는 용어는 제한된 의미를 가지므로 앞으로는 정보란 용어로 대신함)를 통해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가짜 정보들, 단편적인 정보를 엮어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 부족, 내 입맛에 맞는 정보만 접촉하게 되는 정보 편식증,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서 특정 방향의 정보만 제공되고 있는 경우 등.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과 이 믿음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내 자신만의 신념체계가 수동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개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수온을 느끼지 못하고 삶겨 죽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의 바다에 절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1863년부터 1998년까지 캐나다에서 15만 명 이상의 원주민 어린이를 백인 동화 목적으로 수용하여 정부 주도로 운영된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1,000구 이상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굴되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실제 운영은 교회에서 했다고 하는데, 그중 다수의 사인은 부적절한 관리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당시 학교의 운영 책임자나 담당자였을 종교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원주민 어린이들에게 폭력이나 비위생적인 환경 제공과 같은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까? 단기간이 아니고 백 년이 넘게 운영되어 왔다면 분명 어떤 일관된 믿음이 그 조직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인데, 매일 종교의식을 행하고 수시로 기도하면서 지금 우리가 읽는 것과 같은 성경책으로 가르침을 공부했을 터, 어찌 죄의식을 느끼지 않거나 심지어 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까?

여기는 나는 그들 모두 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유대인들 중 유대민족을 제외한 세상 나머지 인간들은 모두 짐승이라는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고 그들 중 대다수는 그러한 가르침이 하느님의 뜻에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사로가 잉카 원주민들을 거의 전멸시키고 그들의 유적지에 성당을 세우고 참 인간이 되라고 외쳤을 때 모두 아멘 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릇된 믿음으로 무장시키는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 순간 그릇된 신념의 체계를 더욱 공고히 만들고 있지 않나? 라는 의심이 드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아랍계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슬람교를 믿게 되기 쉽고 인도에서 태어난 아이는 힌두교를 믿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처한 환경에 의해서 절여진 내 신념의 체계에 따른 행동을 전적으로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깨어 있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본다. 깨어 있어야 도적이 오는 것도 알고 주인이 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매 순간 도적이 올 수 있고 주인도 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매 순간 옳은 정보와 그릇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신부님이 말씀하시길 한국에는 33명의 예수님이 오셨거나 지금 살고 계시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자신이 진짜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가짜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날이 올 때 오시며 그날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를 사칭하는 자가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올바른 가르침과 거짓 가르침을 구별하지 못한 신자들까지 같은 수준으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도적과 주인을 구분할 수 있는 100% 확실한 능력과 환경을 가지기 어렵고 도적은 또한 계속 교활 해져서 주인과 점점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묵상해 본다. 첫째, 겸손해지자.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것과 다른 주장과 관점을 경청하고 맞다고 생각되면 자존심을 굽히고 수용할 수 있도록 깨어 있자. 둘째, 소실점을 옮기는 노력을 해 보자.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을 볼 때 다른 방향도 있음을 인정하고 그 다른 소실점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 그래서 더 큰 관점에서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깨어 있자. 셋째, 공부하자.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법. 끊임없이 공부해서 도적과 주인의 모습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깨어 있자. 넷째, 본질을 생각하자.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서 이것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원주민 어린이를 교육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하느님이 과연 이런 교육을 좋아하실까? 라는 의문을 그 당시 운영을 담당했던 분들이 깊이 생각했는지 의심스럽다. 항상 본질을 생각하며 깨어 있자.

오늘도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컴퓨터가 있다. 손에 쥐면 잘 안 보일 정도의 작은 셀폰도 십여 년 전 라면 박스보다 컸던 데스크탑 성능보다 좋다. Google을 불러내서, 이 글을 쓰면서 사용했던 ‘신념의 체계’란 용어의 개념을 물어보니, 학술 논문과 관련 글들이 수십 편 쏟아진다. 깨어 있기 위해서 내가 조금 전 주장했던 4가지 원칙들의 내용이 순간 헷갈린다. 도둑과의 싸움에서 이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2021년 6월 30일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 기사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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