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의 달, 김수환 추기경 생전에 모습을 담았습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김영석(요셉)과 서중하(마르티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가 조선말 무진박해 때 옥사(獄死)하고,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일찍 작고해 무척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유트브에서)
아래 글은 “김무진 국가상훈편찬위원회 편집국장”이 제가 쓴 (캐나다에서 시조로 조국을 노래하다) 시조를 보시곤, 감명 받았다면서,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善終)하실 때 쓰신 글을 제게 보내온 글입니다.
당신이 가시는 날엔 하늘의 태양도 울먹였던 가요? 아니 밤하늘의 달그림자도 서먹했던 가요, 우수(雨水)가 지나가고 반가운 봄기운의 여울이 들려오려는 문턱에서 그러나 당신은 이를 넘기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성도와 성녀와 사랑하는 모든 신도들을 다독거리며 보살펴주셨기로 당신이 가시는 날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조객들의 행렬들은 을지로 에서~퇴계로 에서~명동성당까지의 25시는 마치 그 어느 날 청와대의 부름에도 사랑만은 깨트릴 수 없다고 밤새 보호막을 쳐 주셨던 그 따스함처럼 당신이 가시는 그 날엔 하늘마저도 우울해 밝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시나요? 봄은 가면 계절이 바뀌면 또 찾아오련만 그러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당신의 조용한 침묵과 무표정 속의 따뜻한 사랑은 마치 한가한 고향집 구둘 방의 훈훈함처럼 차디찬 민족 저마다의 가슴에 한(恨) 맺힌 별 별의 미련을 다 들어주셨고 그러기에 또 찾고 싶고 뵙고 싶은 미련들은 국민 저 가슴마다에 고향집 같은 아늑한 품이 되시어 겨레의 아우성 속에서도 단 한 치 외면(外面)하지 않는 정의(正義)의 바른 품 안이 되셨습니다.
1970~80년 그 허구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서 사랑과 나눔을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하고자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불사조(不死鳥)만 같았던 당신, 강자(强者)보다는 언제나 약자(弱者)의 손을 더 높이 들어주셨고 배부른 자의 권세(權勢)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자의 허기(虛飢)를 더 달래주시었던 당신, 이 큰 속내는 권력자들에 들려주는 은유적 언중유골. 경고 매세지로 들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손수 당신이 책임지겠다는 희생정신의 뜻이겠지요.
마지막 남기신 말씀 그대로 “세상에서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 하십시오.” 하신 말씀은 너무나도 송구하고 또 부족한 사회 속에 남기신 영원한 진리요 변함없는 참 교육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하셨다면서요, “안구(眼球)도 기증하라” 하셨다면서요, 선생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안구는 칠순(七旬) 노령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각각 성공적으로 이식(移植)이 되어 제2의 광명의 세계를 선사하셨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칠흑(漆黑)같은 세상에서 지냈거늘 정작 하느님을 뵈옵는 듯 다시없을 제2의 인생을 열어주시고 떠나가신 참 사랑은 과연 그리도 선생님의 사랑은 영구불멸 진했답니다.
추기경님이 떠나시며 안구를 기증했다는 사랑의 물결은 파도를 타고 그간의 안구기증 희망자(希望者)래야 불과 하나 둘 뿐이었던 이제까지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너도 나도 수십만 명의 예약자까지 스스로 신청, 희망, 예약 하였다니 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요, 지구촌에서 상면하는 하느님의 은혜인가 싶었습니다.
평소 간직하시던 “나무 묵주(黙珠” 하나만을 가지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배품과 따뜻한 사랑과, 그 밝음은 지구촌에 영원히 숲처럼 숨 쉬고 꿈처럼 살아있을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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