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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애민정치" 띄우기 ... 눈물보다 결단이 필요

이영종 2020-11-18 0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은 거짓과 위선을 은유한다. 이집트 나일 강(江) 악어가 사람까지 잡아먹고 죽은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고대 서양 전설이 유래다. 실제로 악어는 눈물샘과 턱이 움직임을 관장하는 신경이 동일해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하니 과학적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닌듯하다.


 지난달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보인 공개적 눈물이 화제다. 김일성광장에서 한밤중 펼쳐진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 연설에서 그는 “감사의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다”며 주민과 군 장병을 위로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연설을 이어가던 김 위원장은 끝내 눈물을 터트렸다.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파격이다.


 어제 아침 평양에서 발간된 노동신문은 A4 용지 10장 분량의 긴 정론(政論)을 실었다. ‘인민의 목소리, 우리 원수님!’이란 감성적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당 창건 75주 김정은 연설에 시선을 집중한 정론은 “마음속 고백, 마음속 진정은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뿐이라고 하시며 복받쳐 오르는 격정에 눈굽(눈 구석)을 적시신 우리의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라며 감격스러워 한다. 온 광장이 울음바다, 눈물바다가 됐다고 분위기를 전하더니 “그 격정의 28분간” “영원히 기억할 순간” 등으로 묘사했다.


 북한 설명대로 김정은 연설은 잘 짜인 28분 분량의 모노드라마였다. 극장국가다운 연출이었다. 한밤중 레이저와 네온 조명, 그리고 군중의 환호가 어우러졌다. 양복 차림으로 등장한 최고지도자는 2020년 한해를 회고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가 9월 친서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끔찍한 올해”라고 말했던 그 시간이다. 감사와 위로의 말을 이어가던 그는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 우리 인민들이 생활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광장에 운집한 주민과 엘리트 및 군 장병의 시선은 김정은의 눈에, 귀는 그의 갈라진 목소리에 집중됐다. 전례 없는 솔직함에 ‘과오’와 ‘능력 부족’을 스스로 인정하는 최고지도자의 모습에 당원과 주민의 마음은 뭉클했을 수도 있다. 그 밤이 그대로 깊어갔다면 말이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연설 중후반 김정은은 핵과 전쟁억제력을 운운하며 “힘이 없다면 주먹을 부르르 쥐고 흐르는 눈물과 피만 닦아야 할 것”이라고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후 연설은 그의 눈물이나 미안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강해졌고 시련 속에서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말에서는 주민에게 무한 반복의 고통과 인내를 강압하는 폭정의 냄새가 풍겼다. “시간은 우리 편”이란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풍에 가까웠다. 


  내년 1월 개최를 예고한 노동당 8차 대회의 청사진도 허망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딱 5년 전 7차 대회에서 “휘황찬 설계도”라며 김정은이 펼쳐 보인 전략이 “목표들이 심히 미진 되고 인민생활 향상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8월 19일 노동당 7기 6차 전원회의 결정서)를 빚었다면서도 재탕하려 든다.


 전차와 이동식미사일발사대(TEL) 등이 굉음을 울리며 광장에 들어섰을 때 김정은의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바라보듯 무기개발 총책 이병철과 총참모장 박정천을 연신 불러세우며 질문공세를 하는 김정은의 머릿속에 미안함과 눈물과 솔직함은 이미 휘발된 듯했다. 결말은 김정은의 파안대소로 채워진 해피엔딩이었다.


 한 달 넘은 당 창건 75주 연설을 이제야 다시 거론하는 건 조짐이 좋지 않은 이유에서다. 노동신문 어제 정론에 드러나는 북한의 최근 실상은 김정은 찬양과 우상화의 광기가 느껴진다. 

  지난 8월 김정은이 수해 실태를 파악하러 나갔던 황북 은파군 대청리에서는 차바퀴 자리가 찍힌 흙을 붉은 천 주머니에 싸서 가보처럼 간직한 농민이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직접 몰았던 일제 렉서스 대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의 바퀴 자국을 신성시하는 분위기 띄우기다. 김정은이 오간 길을 매일 아침 쓰는 할머니도 있다고 한다. “민심이 불덩이처럼 달아있다”고 정론의 필자는 풍을 친다. 이쯤 되면 “수령을 신비화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던 김정은의 실용주의는 실종상태다.


 김정은의 지난 한 달은 쓸쓸하고 외로웠을 수 있다. 지난달 22일 중국군 6·25 참전 70주 참배행사 이후 25일간 공개일정이 없었는데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난 4월 ‘유고·사망설’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지만, 국제무대에서 그의 존재감은 쑥 줄었다. 국제사회의 코로나 방역 연대나 미·중 갈등을 비롯한 굵직한 이슈에 북한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의기투합으로 반짝했던 북·미 관계나 국제무대 스포트라이트는 빛이 바래가고 있다. 사실상의 미 대선 결과 확정(지난 8일)에도 평양 관영 매체가 아직 사실 보도조차 못 하는 건 북한과 김정은의 고민을 대변한다. 김정은이 유세 기간에 자신을 폭력배(thug)라고 거듭 호칭한 조 바이든 당선인과 북·미 관계의 모멘텀을 그대로 이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김정은에게 문재인 정부의 대북 구애 목소리가 제대로 들릴 리 만무하다. 그래서 통일부 장관이 지난 4일 판문점까지 달려나가 “남과 북이 새로운 평화의 시간을 다시 설계하자”고 목소리를 높인 건 헛발질에 가깝다. 그 시간 ‘라자루스’를 비롯한 북한의 해커 집단은 한국과 글로벌 제약사의 전산망을 누비며 코로나19 백신 개발 관련 정보를 탈취했다. 한국 땅에 태어났으면 스마트폰과 반도체와 전기차를 만들었을 인재들을 망신스런 국가 도적질에 동원한 것이다.


 안타까운 건 나아질 기미가 없는 북한 주민의 삶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공동 보고서에서 “북한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1010만 명이 식량 부족에 처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현실은 조선 시대 인구의 40%가량이 노비였다는 한 연구결과와 오버랩된다. 


  전쟁 전리품이나 이민족 복속이 아닌 같은 민족을 이처럼 많이, 오랜 기간 노예로 부려온 건 유사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아프다. 봉건의 추억은 되살아나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판을 달고 있는 북한이 식량으로 주민의 삶과 충성도를 저울질하며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건 아닌가.


 북한 최고지도자의 웅변은 계속된다. 일흔해가 넘게 ‘이밥에 고깃국’을 기다려온 순진한 주민을 향해 “인민이 노동당의 진심을 믿어줘 고맙다”고 울먹인다. 악어의 눈물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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