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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한 언어 장애자

백경자 2021-10-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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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한 언어 장애자 


1967년 12월 23일은 내 삶이 방향을 전환한 날이다. 가족들과 이별의 슬픔을 나누는 내 마음과는 너무도 다르게 그날 김포공항의 하늘은 마치 나의 출발을 축하하듯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나의 꿈은 조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가서 내 꿈을 이루는 벅찬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이후에 다가올 어려움들은 미처 알지도 못하고 미지의 삶을 향한 첫 출발이었다.


내가 언어의 장애자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직장에서였다. 캐나다에 도착해 실무에서 겪게 된 언어장벽, 매일 해결해야 하는 환자 간호에서 오는 스트레스, 앞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득하게만 보였다. 조국에서 수년간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은 간데없고 매일같이 경험하는 언어 장벽의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내 가슴은 매순간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는 일터에 나가는 게 무서웠다. 또 하루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 속에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더이상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내 머리속에 저장된 나의 모국어를 소멸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각오를 하였기에 어떤 고난도 나는 이곳에서 감내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조국에 부모님과 형제 외에 나의 소유는 아무것도 남겨두고 온 것이 없었기에 이곳에서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배운 언어인 내 모국어를 잊어버리는 작업으로 들어갔다. 뇌에 저장된 언어들을 제거하는데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모국어는 서서히 무의식 속에서 사라져갔다.  


내가 가지고 온 나의 문화를 서서히 잃어가면서 이곳의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는데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듣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이 환자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고 현지인처럼 읽는데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두뇌에서 번역을 하지 않고도 서서히 하고픈 말이 자유스럽게 쏟아져 나왔지만 대학에 돌아가서 공부를 하려니 또 난간에 부닥쳤다. 이젠 듣는 게 편하니 쓰는 게 어렵게 되었으니… 그렇게 나는 언어를 잃고 얻고 하는 긴 세월을 보냈다. 허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누가 나에게 자유롭게 두 언어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피나는 투쟁의 세월이 흘렀을까! 이젠 내가 하고픈 일에 특별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동료간에 부당한 처사가 생겨도 이젠 내 의사를 표시할 언어가 생겼다. 우리 한국 환자가 언어로 인해 모욕을 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고 할 때, 나는 결코 참지 못해서 병원에 진정서를 몇 번이나 올렸는지. 얼마나 오랜 세월 나 자신도 이 사회의 조직 속에 희생자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서, 생김새가 자기들과 달라보여서, 이 곳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등등으로 오는 그 부당함은 영어라는 언어가 익숙하지 않을 때 겪은 마음의 상처이다. 


그때 나는 먼 길을 떠났다. 그곳은 온타리오 북쪽에 위치한 기차 여행으로 이틀을 가야 했던 마라손(Marathon)이란 소목재 도시였다. 이곳에서 나는 언어에서 오는 내 안식을 찾을 수 있었지만 살아가는 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친구가 필요했고, 누군가 뜻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대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하여 엄청난 고독이라는 무서운 외로움이 나를 서서히 조여오고 있을 때 일년이 지난 후 어머니와 언니가 있는 토론토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다리 부상으로 입원한 한국 환자의 통역을 같은 병원간호사의 부탁으로 갔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을 만났고, 그 갈망하던 대화의 상대로 남편은 내 삶 속에 운명처럼 들어왔다. 


한 평생 우리는 수 없는 만남과 인연을 맺지만 남편과의 인연에서 우리에게 두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우리의 유전인자를 품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가져다준 기쁨, 성장 과정에 안겨준 행복감, 부모의 뜻대로 바르게 잘 자라줘서 착한 자식으로 성장해 주었으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소망이 있었다. 그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주말이면 장거리를 운전해서 사비로 교육을 시켰으나 나의 딸과 아들은 엄마의 모국어가 제2외국어가 되어 언어의 장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민 가정 모두가 겪는 일이었지만, 부모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엄마아빠의 모국어를 자유롭게 습득하고 언어 능력을 유지하고 향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등, 지금처럼 모국어를 잊지 않게 하는 언어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니 아쉬운 점이다. 캐나다에 사는 한인 가족 자녀들이 자녀 세대와 언어가 통하지 않고, 언어가 만들어 내는 문화의 차이를 해소할 수 없어서 세대차이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아쉬움을 겪었던가. 다문화시대인 오늘은 영어만 하는 사람보다 모국어를 같이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이 사회는 더 요구한다. 


모국어를 못하고 영어만 잘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때가 있었다. 오늘날은 아이들이 두 언어에 능통하다면 더 많은 직업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언어는 뜻과 마음을 나누는 절대적인 도구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들은 한국음식, 한국문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만약에 언어가 능통하다면 전문직을 얻어 얼마나 더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의 모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니 감사하기만 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 해결을 이 기막힌 언어라는 도구가 해결해 주지만, 또한 적절한 언어사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모르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는가.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남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아름다운 언어는 삶의 고통과 슬픔의 치료사가 될 수 있다. 나는 옛날 지워버린 아름다운 모국의 언어를 되 찾기위해서 지금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보낸다. 나이가 들면서 내 모국어가 좋으니 그 속에서 글로 상상의 그림도 그려보고 살다가 가고 싶은데 왜 그것이 그토록 힘들기만 한 지. 그래도 또 희망을 가지고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나는 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잃어버린 언어를 타자로 찍어 내려가는데 여념이 없는 하루를 보낸다.


2012 09 06

백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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