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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본 그 꽃

최혁 2025-02-28 0

고은 시인이 지은 '그 꽃'과 마주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 단 석 줄, 열일곱 글자에 깊은 뜻이 한데 담겨 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머리를 들고 나아갈 때 발밑에 있는 작은 꽃은 쉽게 놓쳐버린다. 때로는 발로 짓밟고 지나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내려갈 때는 고개를 숙이며 주변을 살핀다. 그제야 비로소 꽃이 눈에 들어온다. 내 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조심하게 된다.


기독교는 '내려오신 분, 예수'를 믿는다. 그는 내려오시며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그 꽃'을 보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예수는 더 가지려고 하는 분이 아니다. 누가 덜 가졌는지, 누가 약한지를 깊이 살피는 분이다. 누가 아픈지, 누가 우는지, 누가 굶주리는지를 보고 함께 눈물 흘리며 먹이고 고쳐주셨다. 예수의 정신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덜 가지고, 나누고, 희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 사람이다. 많은 교회는 부활절을 앞두고 사십 일 동안 사순절(Lent)로 지킨다. 올해는 삼월 오일부터 시작된다. 이때에 예수의 삶을 묵상하고 예수의 삶을 살아내려고 애쓴다. 사순절에 나 스스로에게, 교우들에게 질문한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누구를 만나기를 원하실까?'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이다. 올라가려고만 하는 버릇을 버린다. 내려오신 분과 함께, 내려가는 길을 걷는 법을 배운다.


우리에게는 예수처럼 누가 아플 때 고칠 수 있는 능력이, 누가 울 때 금방 눈물을 그치게 할 능력이, 누가 굶주릴 때 그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예수와 같은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와 같은 긍휼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임을 깨닫는다. 긍휼은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넘어서 실천하는 사랑이다. 능력이 없는 것보다 긍휼이 없는 것에 마음이 더 아프다. 능력은 우리 뜻대로 얻을 수 없지만, 긍휼의 마음은 구하면 구할수록 더 생긴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나의 평생 기도 제목이다. ‘예수님처럼 긍휼한 삶을 살게 하소서.’ 목사이기에 날마다 은혜와 긍휼이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더 많은 은혜와 긍휼에 목말라 있다. 올라가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려가며 사람들의 숨겨진 아픔과 고통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 마음으로 아픔에 함께 하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기도할 수록 하나님께서 긍휼한 마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는 마치 닭장과 같아 보이고, 경제는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다. 흔들리고 엉켜 있는 상황에서 올라가려는 사람은 보이지만 내려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높아지려는 길은 강조되지만, 낮은 곳의 고통은 쉽게 묻힌다. 들려오는 소식은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멱살잡이다. '죽임을 넘어 살림'의 정신은 어디있는가? 내려오며 본 그 꽃을 밟지 않고 살리려는 애씀이 긍휼이요, 예수 정신이다.


긍휼은 그리스도인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내 발 밑에 있는 '그 꽃'을 보며,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아픔을 느끼고, 함께 마음을 나누며 그 아픔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관심과 배려가 변화를 만든다. 이런 마음가짐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큰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우리 모두에게 웃음을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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