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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싸움은 조상이 남긴 유산

정충모 2025-04-03 0

고금을 통해보면 논공행상은 어느 왕조 때고 따라 다녔다.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위정자들에겐 찰거머리 같은 존재다. 특히 중국의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다. 출세를 위해서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역적이 충신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반대로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원인은 권력과 명예 때문이고 더 나가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다. 이와 같은 사리사욕은 종당에는 패가망신을 당하고 귀향을 가는 전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중국의 대표적인 논공행상은 주나라를 꼽을 수 있다. 낚시꾼 출신인 강태공은 주나라를 일으킨 공이 컸다고 하여 주 무왕은 그를 제후에 봉했다. 또 많은 공신과 왕족을 제후에 봉함으로써 군신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여 백성들을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다. 하지만 강태공이 자신의 일신을 위해서는 성공했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역적이었다. 

후세에 당태종은 아버지 이연을 도와 수(隋)를 무너뜨리고 당(唐)을 세우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었으므로 (고조)는 왕위를 큰 아들 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극도의 불만을 느낀 당태종은 내란을 일으켜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 역시 논공행상으로 불거진 가정적 역사 사건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같은 사례다. 그도 개국 공신에게 공적의 관계없이 거기에 상응하는 예우를 깍듯이 해 주었다. 그런대도 많은 대신들은 “두문동”골짝으로 숨어버린다. 그들은 새 왕조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논공행상의 불만을 가진 대신들이 더 많았다

이성계는 그들을 설득하려 (차사)를 보냈지만 끝내 고집을 부리며 완강했다. 급기야 산에다 불을 질러 더러는 타 죽기도 했다. 몇몇 생존자만, [전오륜, 김충한,] 강원도 정선으로 피신하여 초근목피로 근신하다 병사하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거리에 거지로 생을 마쳤다. 이색. 남은. 정몽주. 정도전 같은 선비들만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후에 태조 이방원에 멸문지화를 당했다.

여기서 이태조의 행적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공민왕과 최영장군의 북벌정책의 책임이 크다고“할 수 있다. 장마철인데다 질병은 창궐하여 이길 승산이 없는데, 끝까지 이성계에게 침공을 강요했다. 군사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여기저기서 탈영병이 늘어나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사태가 그런대도 최영은 이성계에게 엄한 군령을 내렸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이성계는 좌 장군 “조민수”를 협박하여 철수한 것이, 저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성계가 역모를 일으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쇠태 해가는 고려는 변변히 인제가 없었다. 설사 있다 하드라도 이성계 눈치 보느라 앞에 나서지를 못했다. 만약 고려의 조금만 식견이 있는 지략가가 있었다면 이토록 무기력 하게 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에게는 그런 (책사)가 없었던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위에 필자가 세계역사 이야기를 쓴 것은 요즘 남북 사태를. 비롯해. 러시아. 우쿠라이나.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더 나가서는 전 세계계가 마치 삼차전쟁이라도 일어날 우려성이 곳곳에서 배어나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 위정자들은 냉정해야 하고, 국민들은 사랑하는 미음으로 정치를 해야 하거늘 여당. 야당 하나같이 위에 나열한. 인물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그 전철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것이 안타까워 필을 잡았다.

북한이 같은 동족 남한에게 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금방이라도 처 들어올 기세인대 우리의 정치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의 정세를 강 건너 불 구경하 듯하고 내 몸 챙기기만 급급해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오호 통제라! 왜, 우리는 이색. 남은. 정몽주. 정도전 같은 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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