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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백경자 2024-02-10 0

1969년 한국이나 독일을 거처서 토론토에 정착한 젊은 남녀들이 새 삶을 결심 하고 부부가 된 사람들이 꽤 많았던 해였다. 우리 부부 역시 그 해 10월 18일에 많은 어려움을 넘고 사랑의 결실을 결혼이란 평생 계약 속에 묶어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 하였다. 다행히 우리 결혼식에는 언니 내외분과 어머님, 어린 조카와 주위에 몇 몇 지인들이 와서 그날을 축하해 주었다.


그 시절 우리가 다니는 성당 안에 어떤 분의 기발한 생각으로 69 년도에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에 동의 을 얻어서 모인 부부가 7 쌍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친목 겸 일년에 몇 차례 모임을 갖고 지내오면서 25주년 은혼식을 갖자는 의견과 쿠루스 여행에도 모두가 동의하여 그 준비를 해 왔었다. 금전적인 준비와 여행에 필요한 정보, 여행의 종류, 몇 가족이 갈수 있나 여부, 은혼식의 경비, 초청장의 대상 등등의 모든 것들을 준비 한끝에 우리 5 가족은 첫 쿠루서 여행을 희랍으로 떠날 것을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은혼식도 잘 치렀고 여행도 바다와 육지를 번갈아 가면서 구경을 할 수 있어서 더 가슴에 머무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또 은혼식은 본당의 두 신부님들(고 고 종옥 주례신부님, 최규식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의젓하게 성장한 자녀들을 앞세우고 성스러운 혼배 성사 을 올린 후에 우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런 일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캐나다 한국일보사는 신문에 첫 페이지를 장식해주기도 했다.


7 가정이 초대한 손님들은 그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자리를 함께 해 주었고 우리들은 경험이 풍부한 신랑 신부가 되었지만 혼배 성사를 통해서 새로운 계약 식을 올렸던 감회가 깊었던 해였다. 식이 끝난 다음에 신혼부부가 하듯 우리모두는 이곳에서 야외 결혼식장으로 토론토에서 잘 알려진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에드워드 공원에 나가서 사진 전문가를 불러 합동, 개인, 단체 등의 많은 사진들을 남겼다. 그때 남자들은 멋진 양복과 나비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아름다운 한복 차림으로 변신한 남녀들이 공원의 아름다운 배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중에 우리들의 단체 사진은 내가 늘 즐겨 보는 사진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떠난 첫 여행지는 희랍의 아테네였고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는 동안 파 테 농의 유적지와 그 외 희랍의 역사와 관계되는 몇 군데를 들려볼 기회도 있었다.  밤이면 배에서 밤새도록 항해 을 하고 아침이 되면 언제 도착했는지 배는 육지에 정박해 있었다. 육지마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섬들, 우리가 기대를 갖고 도착한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배 안에 갇혀서 그렇게 기대가 컸던 원 드 오브 7 이란 곳을 선상에서만 안타까워하면서 바라볼 수 있었던 귀한 경치를 놓치게 된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 다음에 간 곳은 파티 무스(반모섬)와 미코 노라는 섬이었다. 이곳에서 희랍을 상징하는 눈부신 흰색과 푸른색으로 모든 건물들이 이색적인 색채를 이루고 있는 이 자그마한 도시들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은 곳들로 머문다.


낮이 되면 우리 일행은 배에서 내려 희랍의 역사적인 곳들, 고대 신들을 조각으로 만들어서 모아 놓은 오라클도 방문했고 그곳에서 책으로만 읽던 신들의 얼굴들을 대하는 시간도 있었다. 밤이 되면 배가 항해하는 시간이니까 배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쏟아 놓은 무수한 별들과 밀려오는 검고 성난 파도의 소리는 감히 위협을 주기에도 충분했다. 아침에 가는 곳은 식당이었다. 친절하게 “올라, 올라”라는 첫인사로 반겨주는 배 직원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 5쌍의 부부는 바다와 육지 여행을 동시에 즐기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는데 엄청난 소식이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어머님이 쓰러 지셔서 혼수 상태로 들어갔다고 아들이 전해주었다. 그 해는 내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했던 해였고 시간을 다투는 결정 앞에 나는 육체적으로 더 이상 여행길에 오를 수가 없었다.  한국을 나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육신의 허약함 앞에 딸은 “내가 엄마라면 나는 한국을 갈 것이다. 육신의 허약으로 비행기 안에서 사망할 지은정” 이렇게 딸은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딸은 나의 곁에서 위로해 주었고 어떤 어려운 결정을 할 때는 딸이 나의 조언자였다. 그때 딸이 준 그 용기는 내가 평생을 두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만약 그 결정이 나의 한국방문을 반대했더라면 나는 평생 동안 후회하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마지막의 가시는 시간을 내가 보살펴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크다란 축복 중에 축복이었다. 더욱이 한국식 장례는 이곳과 무척 다르며 가족이 밤을 새며 사망자 곁을 떠나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와 성가를 부르면서 숨진 영혼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은 상객들을 맞이하는 날로 끊임없이 몰려오는 모든 수많은 문상객들을 대접해 보내는 날이었기에 그때 나는 어떻게 그 일들을 해냈는지...... 그렇게 나는 어머니를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처로 보내 드리고 왔다. 


만약 어머니의 간절한 나의 결혼의 권유가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아마도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단순한 직업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해 우리들의 여행은 모두에게 기쁨과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시간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삶의 여정의 한 시점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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