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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

손영호 2022-04-21 0

'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이자 ‘위대한 미망인’으로 살다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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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대에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미샤 세르트(Misia Sert, 1872~1950)가 있었다면 비엔나에는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가 있었다. 알마는 당대 유명한 풍경화가였던 유대계 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러와 함부르크 출신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안나 폰 베르겐의 맏딸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화실을 들락거리며 문학, 음악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를 간파한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난해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히기도 했다. 1892년 쉰들러가 사망하자 어머니 안나는 남편의 제자였던 4살 연하의 카를 몰과 재혼한다. 카를 몰은 1897년 '비엔나 분리주의'를 창시한 유명 화가로 알마의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들 속에서 자란 알마는 18살 때 분리파의 초대 의장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첫 애인이 되었다.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키스(Der Kuss)'는 알마와의 첫 키스를 그린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 후에 알마는 당시 변호사로 궁정극장의 총감독이며 문학가, 철학가였던 막스 부르크하르트로부터 고전과 현대 문학을 배운다. 그는 철저한 반 유대주의자였으며, "넘어지는 사람은 밀어버리라"는 니체의 철학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은 알마의 일생에 깊숙이 녹아들었고, 그 후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종 편견과 실연의 고통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만 20세가 된 1900년 봄, 알마는 비엔나의 유명한 작곡가₩지휘자로 나중에 비엔나 민속 오페라극장 감독이었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면서 염문을 뿌렸다. 유대인인 쳄린스키는 12음기법으로 유명한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알마는 1년여 동안 쳄린스키의 애간장만 태우게 하고는 1902년 3월9일 22살에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현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이었던 41세의 구스타프 말러(1860~1911)와 전격 결혼하여 그녀의 이름이 알마 말러로 바뀌고, 말러가 사망하기까지 9년간 그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인이 되었다. 


1907년 7월 다섯 살 된 첫딸 마리아가 디프테리아로 죽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알마는 1910년 5월, 둘째딸 안나를 데리고 그라츠 온천에 요양차 들렀다가 4살 연하의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열애에 빠진다. 당시 그로피우스는 무명의 건축가였지만 1919년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를 창시한 인물이다.


1911년 5월18일 말러는 마지막 교향곡 10번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일설에는 그로피우스와의 애정 행각이 말러의 명을 단축시켰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그녀는 욕정도 채우고 부와 명성도 거머쥐겠다는 영악하고 속정 깊은 매력이 넘치는 요부였던 것 같다. 


알마는 말러 사후 그가 남긴 막대한 유산으로 비엔나 사교계의 여왕벌로 등극한다. 1912~1914년 사이 적어도 4명의 유명 인사들과 애정행각을 벌였는데, 그 중 7살 연하의 유명화가 오스카르 코코슈카(1886~1980)와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알마가 걸작을 바치면 결혼하겠다고 하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코코슈카가 그린 그림이 유명한 '바람의 신부(Die Windsbraut)'이다. 


그러나 알마는 이 젊은 화가에게 뜨거운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의 역할을 하고, 자신도 그로부터 새로운 의욕과 열정을 수혈받는 것으로 만족할 뿐, 결혼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명성과 품격을 지닌 남자를 선택하려 했다. 이때 실연의 충격을 억누를 길 없었던 코코슈카는 1918년 알마와 실물 크기의 인형을 주문 제작하여 산책길, 식당, 오페라 공연 때도 대동하며 늘 침대에 두고 같이 지낸 얘기는 유명하다.


알마는 1915년 8월18일에 베를린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여 그 다음해 10월5일 딸 마농이 태어난다. 그로피우스의 영혼과 알마의 육체를 빼닮은 마농은 오스트리아 유명작곡가 알반 베르크가 친딸처럼 귀여워했는데, 그만 꽃다운 나이 19살 때 소아마비로 사망한다. 


1917년 11월14일 베를린 임페리얼 호텔. 알마의 살롱 멤버인 엘리트 지식인 그룹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11살 연하의 프란츠 베르펠(1890~1945)을 만난다. 처음엔 키가 작고 뚱뚱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맘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로피우스와는 달리 음악에 조예가 깊고 창조적인 문학적 아이디어에 반하게 된다.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1920년에 정식 이혼하고 베르펠과는 10년의 구애 끝에 1929년 비로소 결혼했다. 이름은 알마 쉰들러-말러-그로피우스-베르펠로 길어지나 이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바람피기에는 늦은 나이 50줄로 들어서니 급기야 베르펠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알마와 베르펠은 피신하여 우여곡절 끝에 선편으로 1940년 10월13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베르펠은 미국으로 오기 전 스페인 루르드 지방에 머물렀을 때 들었던 성 베르나데트 수비루에 관한 이야기에 바탕하여 1941년 발간한 소설 '베르나데트의 노래(The Song of Bernadette)'가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20세기 폭스사가 판권을 사들여 1943년 헨리 킹 감독, 제니퍼 존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알마가 원한 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베르펠은 많은 유산을 남기고 1945년 8월26일에 치명적인 심장병으로 향년 55세로 사망한다. 


알마는 유명 남편들이 남긴 막대한 유산으로 '위대한 미망인'이 되어 사교계의 여신처럼 살다가 뉴욕에서 1964년 12월11일 향년 85세로 타계했다. 알마의 시신은 다음해 2월8일에 비엔나로 운구되어 첫 남편 구스타프 말러와 맏딸 마리아 그리고 마농 그로피우스가 묻혀있는 그린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비엔나 예술가들의 절대적인 뮤즈였으며 주위를 맴도는 숱한 남자들 중에서 최고의 명성과 재능을 가진 남자만을 골라서 모두 정복한 팜므 파탈 알마는 자서전 '다리 놓는 사랑'처럼, 사랑이란 결국 다리를 놓는 관계이지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믿었던 영원한 ‘바람의 신부’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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