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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라

전철희 2022-06-30 0

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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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뜰에 동물들이 자주 놀려온다. 다람쥐, 새, 스컹크, 이웃집 고양이. 가끔씩 라쿤도 보인다. 도심이지만 비교적 큰 나무들이 있는 조용한 곳이어서 그렇겠지만 주인의 심덕이 후해서 그럴 것이라는 나름 좋은 생각도 해본다.  


며칠 전 그동안 뜸했던 덩치 큰 라쿤 한 마리가 대낮에 뜰 중앙에 서 있는 큰 전나무를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통상 밤에 몰래 왔다 가는 놈인데 대낮에 나타난 것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움직임이 많이 다르다. 내려오는 모양새가 불편해 보인다. 속도도 늦고…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 같고 입에 약간의 거품도 보인다. 무엇보다 평소와 다른 점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거나 도망갈 기색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인간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다 내려와서는 마당을 이리저리 다니는데,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에서 맴도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18년을 같이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반려견 생각이 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장소에서 하염없이 맴돌기만 하든 모습. 나중에서야 그것이 일종의 치매 증상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저 눈이 나빠서 그런 모양이라고 치부했던 무지함을 후회했던 경험이 있어서 저 라쿤도 병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구글로 검색해 보니 ‘개홍역’이라는 병을 앓는 포유류 동물의 증상과 거의 일치한다. 야행성 동물이 주간에 사람을 겁내지 않고 돌아다니고 움직임이 둔하고 입에서 침을 흘리고…등등. 흔한 병이고 그런 증상이 나타난 후 빠른 시간 내 죽는다고 하며 죽은 사체는 만지지 말고 처리를 위해 바로 animal control centre에 연락하라고 되어 있다. 


짐승이라도 건강한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게 좋은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럽다. 그리고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잡혀가면 곧 안락사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잡아가라고 전화 걸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가쁜 숨을 내쉬며 괴로워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니 20분이 지나지 않아서 젊은 officer가 포획 상자와 장대를 들고 집으로 왔다. 


야생동물의 본능인지 위험을 알아챈 그 녀석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피한다. 비칠거리며 가는 가지를 잡고 올라가서 장대 끝이 닿지 않을 만큼의 높이에서 매달려 버틴다. Officer는 그런 상황에 익숙한지 조금 기다려 보다가 내게 그 녀석이 내려오면 연락하라고 하고 자기차에 가서 기다린다고 한다. 거의 30분 가량을 가는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놈의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다. 라쿤은 지능이 높고 끈질긴 놈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했을 때는 나름 재빠르고 강인한 삶을 살았을 녀석이 죽을 때가 되어 혼미한 상태에서도 삶의 본능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온다. 


가지를 붙잡은 다리에 힘이 빠져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밑에서 기다리던 officer의 장대에 몸이 닿으니 놀라 움직이다가 나무 아래로 툭 떨어져 버린다. 장대 끝의 올가미에 목이 걸리고 대롱대롱 달려 포획상자에 넣어진다. 그것이 내가 본 라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약 1시간 가량 병든 라쿤의 모습을 보면서 왜 내 가슴이 그리 찡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병든 동물에 대한 연민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한참 원기 완성 했을 때의 라쿤의 모습과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그러한 것이 꼭 그 동물만의 모습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태어나서 열심히 자신 있게 살다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을 인간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이다. 옆에서 같이 그 광경을 지켜본 딸이 그 라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별라’라고. 별이 된 라쿤이라는 뜻이란다.  그래 별이 되거라. 언젠가 나도 죽은 후에 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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