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가 ‘사계(四季, The Four Seasons)'로 유명한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의 탄생 345주년이다. 그는 1927년 이탈리아 음악학자들이 토리노의 도서관에서 그의 주요 필사본 모음집을 발견함으로서, 사후 거의 2세기만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불어 그를 존경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그의 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비발디 편곡집이 20세기 초에 재평가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와 어머니 카밀리아 사이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살면 얼마나 살까 싶어 세례도 미루다 용케 목숨이 붙어 있기에 2개월 뒤인 5월 6일에야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산 마르코 성당은 아주 풍부한 전통을 지닌 음악학교였고, 새로운 경향의 음악 탄생지이기도 했다. 비발디는 어린 시절부터 진취적인 아버지에게서 근대적인 교육과 음악의 기초 및 바이올린 지도를 충분히 받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 및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 9월 18일 산 마르코에서 가까운 올레오에 있는 산 지오반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25세 때인 1703년 3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몸이 허약했던 그는 집에서 출퇴근하는 배려를 받았는데 그의 유전적인 빨강머리 때문에 '붉은 사제(Red Priest)'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것은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 1703년 9월,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 양육원(Pio Ospedale della Pieta)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된다. 당시 세계 제일의 무역항구였던 베네치아의 거리에는 사생아•고아들이 넘쳐나서, '베네치아인들은 반년은 죄 짓고 반년은 회개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아무튼 비발디는 이때부터 1740년까지 합주장(合奏長)•합창장을 역임하면서 학교 관현악단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여러 도시 및 유럽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비발디는 500개 이상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450곡은 피에타 양육원에 재직하는 동안 써진 것이다. 또 신포니아(sinfonia) 및 73개의 소나타를 비롯하여 칸타타, 교회 성악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베네치아 주교는 미사에도 빠지고 천주님보다는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섬기는 그를 ‘사이비 사제’라고 질타했다. 그래서였는지 끝까지 파문 당하진 않았지만 피에타 측은 곡당 금화 1냥(sequin)만 쳐서 보상했다는데, 당시 인쇄공이 금화 4냥을 받은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발디는 1718~1720년 약 3년 동안 만토바(Mantova, Mantua)에 있는 헤세 다름슈타트 영주 필립 공의 악장을 지냈는데, 이때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 1686~1739)와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 1671~1751)의 영향을 받아 "티토 만리오(Tito Manlio, RV 738)" 등 여러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이 만토바 기간은 비발디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전성기로 볼 수 있으며 그 영향으로 1725년에 유명한 "사계(Les Quattro Stagioni)", 즉 4계절을 묘사한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8"을 작곡하였다. ‘사계’는 각 악장마다 붙어있는 짧은 시(소네트)를 음악으로 표현한, 협주곡 사상 최초의 표제악(標題樂)이다. 시를 읽으며 음악을 들으면 철 따라 바뀌는 정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 그런데 비발디가 45세 때인 1723년, 13살의 안나 지로(Anna Maddalena Tessieri Giro, 1710~1748?)가 오디션을 받기 위해 찾아오면서 그의 운명이 바뀐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만토바로 이민 온 가발 제조업자 피에트로 지로의 딸로 1722년 가을에 트레비소에서 데뷔한 콘트랄토 가수였다.
비발디의 제자로서 언니 파올리나와 함께 몸종 노릇을 하며 성악을 배운 그녀는 1726년 "템페의 도릴라(Dorilla in Tempe)"부터 시작하여 "파르나체((Il Farnace, RV 711, 1727)" "라 피다 닌파(The Faithful Nymph, RV714, 1732)" "몬테주마(Motezuma, 1733)" 등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부상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함께 공연 여행을 다니면서 ‘비발디의 뮤즈’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어서 1735년 5월 18일 그리마니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그리젤다(Griselda)”는 대히트를 쳤다. 지오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 중 '열흘째 날 이야기 ― 인내심 많은 그리젤다'에 기초하여 베네치아 법률가이자 유명한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707~1793)가 각색했다. 자존심 강한 골도니가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0점이다"고 폄훼하자, 비발디는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0점이다"라고 응수했다.
비발디는 94개의 오페라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작곡으로 확인된 것은 50개 미만이고, 그나마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곡은 단지 20여 곡에 불과하다. 더욱이 제목은 달라도 그가 작곡한 곡들은 "짬뽕음악(pasticci)"이 많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비발디는 작품을 수백 개 쓴 게 아니라 한 곡을 수백 번 베껴 썼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 그런데 그동안 온갖 추문에 시달리던 안나 지로가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도망치듯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가극단으로 떠나버린다. 그녀를 그리워하던 비발디는 1740년 3월 21일 피에타 양육원을 사직하고, 5월 11일 오스트리아로 간다. 안나 지로가 떠난지 2년 만이었다.
드디어 안나 지로를 만난 비발디는 비엔나의 영악스런 과부 마담 발러의 하숙집에 머물며, 1727년 1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묶은 "라 체트라(La Cetra, Op. 9)"를 헌정했던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 황제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시 가극단을 맡겨 평생을 보장해 주겠다던 약속 실현 대신에 황제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비발디는 1741년 7월 28일 빈궁(貧窮) 속에서 63세로 객사하였다. 장례식은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그가 묻힌 성 카를 교회 인근의 빈민묘지는 1815~1818년에 비엔나 기술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이 들어섰고, 그가 머물던 집은 오성급 자허 호텔(Hotel Sacher)이 들어서, 인걸은 간데 없고 인생무상을 말해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비발디와 안나 지로의 예술적 협력 이상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나 그후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녀의 행적과 사망에 관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다"며 오기있게 비엔나로 그녀를 찾아가서 객사한, '베네치아의 왕자'로 불리는 사제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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