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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대서소(代書所)”

정충모 2022-12-01 0

“사랑의 대서소(代書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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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수북이 쌓인 공원길을 걸었다. 진눈깨비가 을씨년스럽게 허공을 가른다. 함박눈이었으면 깊은 겨울 정취를 더욱 즐길 것을~~ 때 안인 싸락눈이 심술을 부리는 덕분에, 어릴 적 추억들을 음미하는 기회를 얻었다.


기성세대는 연애하면 주로 펜팔로 연결이 되었다. 전화기가 귀한 시절이라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펜팔”로 애정 표시로 주구 밭는 것이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반백 년이 지난 이야기를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냐. 만, ‘어제저녁 앨범 끝자락에 고이 묻어둔 편지를 뜯어보니 그때의 밤을 새워 끙끙대며 쓰던 문장들이 유치찬란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서소’ 노릇은 하느라,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하고, 망신도 당하기도 했다. 짜장면집에서 빽알 한 도 꾸리를 얻어먹곤, 편지를 대신 써주다 꼬리가 잡혀 그 부모한테 불려가 혼이 나기도 했고, 이웃 형의 부탁으로 누나뻘 되는 학생에게 길목에 지키고 있다가 편지를 전해주다 그녀 오빠한테 들켜 흠씬 두들겨 맞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의 사랑의 대서소 역할은 군대 가서도 이어졌으니, 이걸 두고 팔자소관이라 “하나 보다. 변일 병은 고향이 제주도인데, 아들을 둘씩이나 둔 애기 아버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니고, 고래잡이로 북해도로 전전하다, 뒤늦게 군대를 끌려 온 것이다. 


한글도 잘 몰라 내가 편지를 써주면, 그 부인도 역시 이하동문, 친한 이웃사촌 아가씨가 대신 써준다. 그러다 보니, 주연들은 고독해지고. 대리인과 대리인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전대미문”의 코미디를 연출했다. 


"여보 "보고 싶어요? "언제쯤 오세요? "요즘 당신 생각에 밤잠도 설친답니다. 난 그 편지를 읽으며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해 변 일병 심중을 읽어가며, 무성 시대 변사로 변해서, 울었다, 웃었다, 사랑해, 보고 싶어요, 어쩌고, 저저고, “하며 엷은 음담패설까지 추가해서 보내면 답장에서는 “아니,”오빠도, ‘참 “지금 신파극 해요? “망측스럽게! 그런데 오빠, 한글도 잘 모르면서 웬 문장이 이렇게 멋져? ”아마 군대에서도 한글을 가르치는 모양이지?“


그녀는 내가 쓴 줄 모르고, 변 일병이 쓴 거로 알고 있어 이쯤에서 내가 대신 쓴 거라고, 사과하고 만날 것을 제안하자, “어머머, 맙소사? ”정 상병님, 사과하세요? “사람을 그렇게 놀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사과하면 만나 드릴게요.


나는 솔직히 그녀가 어떤 여인인가, 호기심에서 깍듯이 사과하고 약속 날짜를 적어 사진과 같이 등본을 하여 보냈다. 며칠 후 그녀의 좋다는 답신을 밭았다. 그야말로 조연들이 주연으로 바뀌기는 초유의 희한한 만남이었다.


난 약속장소에 먼저 나가"공작부인"은. 언감생심. 최소한 "백작 부인" 정도면 만족하다, 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뿔싸, 나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공작도. 백작도 안인. 향단이 사촌쯤 된다고, 할까! 머리에 함박만 한 꽃을 들씩이나 치장하고 나온 것이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우동”이다.


공연히 약속했다고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 한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구실을 만든다. "편지를 써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남의 편지라고 그렇게 막말을 해도 됩니까? “뭐 싼 놈이 성낸다고 난,”짐짓 ‘적반하장’을 하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다소곳이 않았던 그녀는 "정 상병님? 그건 오해입니다. 제가 글 쓰는 사람도 아니고! 또 편지를 자주 써 보지도 않았습니다. 언니가 불러 준대로 옮겨 쓴 것인데! 첫 대면서부터 몰아세우시니 듣기가 민망하군요?” 여인은 인물과는 달리 구변도 좋고, 임기응변도 빨랐다.


비상대기라 안 나오려 했으나, "군인정신으로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 나왔습니다만! 시간이 없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다방 문을 뛰쳐나왔다. 비상소집 이라는 대, 더 할 말이 뭐, 있겠는가? 달리 채근할 방법 없는 여인은 나의 뒷모습만 흘기는 듯해, 뒷머리가 근질거렸다.


부대(部隊)에 돌아오니, 동기병 ‘노지심’이 궁금증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왔다. 그야말로 돼지 꼬랑지 붙잡고 순대 나오라는 식이다. "어때서? 예뻤어?” 왕소군, 달기.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모나리자, 등등~~ 동-서양 미인들은 다, 들먹이며, 나의 안색을 살핀다. 


난 고개만 좌우로 돌리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세 풍랑이야! 호박꽃 이였어? 내 소리에 화등잔같이 놀란 그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일침(一針)을 한다. 야. 야, "정 상병? ”돼지 얼굴 보고 잡아먹어? “그러게 내가 신문지를 가져가라고, "했잖아?" 


<현해탄의 침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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