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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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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같은 날

한순자 2025-09-12 0

이민 오기 전, 아마 80년대 초반이었을 것 같다. 그즈음 언제부터 가정주부로 살면서도 엄마들이 문화센터에 무슨 강좌니 모임도 많아 전화를 오전 중에 하지 않으면 통화조차 하기 힘들다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핸드폰은 없고 집 전화로 통화를 해서 약속을 할 때이니 무슨 볼일, 약속을 하려면 오전 중에, 주부가 외출을 하기 전, 약속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뭔가 배움을 찾아, 취미 생활을 하며 각자의 시간을 충실히 채워 가는 중에 서로의 시간을 맞추다 보니, 그야말로 오후에 전화를 해서 집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여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시간만 흘려보낸다는 의식이 만연하기도 했다. 

나 역시도 이미 그 이전부터 청소년 회관에 어느 교수의 강연을 들으러 간다, 서초구청의 어느 명사의 강연이 있어 간다는 등 부지런을 떨다가, 88년 도에 명색이 대리점 대표로 바깥출입을 더 많이 하면서 그때 계몽문화 센터에 등록을 해서 이 강좌 저 강좌를 기웃거리다가 92년도에 이민을 왔다. 

처음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는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그때도 신문에서 보니 토론토 대학에서 어느 교수의 강연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기도, 한국일보 문화센터에 등록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론 점차 먹고 살기 바빠 무언가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닐 만큼의 그런 시간도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젠 완전 은퇴를 하고 등산 동호회에 나가면서 예전의 활기, 그 패턴을 찾은 느낌이다. 게다가 한인회에서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더 분주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 나갔다 왔기에 오늘은 집에서 좀 쉬어야지 하고 있는데, 동호회 회원이 수요일, 핸드폰 강좌를 듣기 위해 간다고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 강좌도 들을 겸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9월 첫 주임에도, 기온이 33도나 되었다. 그래서 모시 적삼을 꺼내 입고 나갔다. 

그날은 수요 강의가 끝나고 배드민턴이 있는 날이었다. 난 그런 복장을 하고는 배드민턴 교실엔 참석하기가 불편해서 밖으로 나와서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웬일!, 기온이 30도가 넘음에도 습도도 높지 않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야말로 최고로 행복한 기분이었다. 

평상시 같거나 아니 그날은 집에서 쉬었다가, 느긋하게 아점을 먹고 맥도널드에 가서 몇 시간 즐기다 올참이었다. 그러면 그 시간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그야말로 모시 적삼을 입고 이렇게 넓은 정원에 앉아 한가하고 달콤하게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겠지 싶으니 말 그대로 그날, 그 순간을 ‘선물’ 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살아온 많은 날 중에 오래도록 기분 좋게 기억되는 날이 있다. 그중 어린 시절 어느 오후, 마루 끝자락에 햇빛이 들면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다.

대체로 그날의 옷차림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기 쉽다. 이미 집에서부터 날씨를 보고 무슨 옷을 입을까 들었다 놨다 거울에 비춰보며 골라 입은 옷이건만, 때론 신경 써서 입고 나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집으로 오기도,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그런데 그날이야말로 살랑이는 바람과 햇빛 모시 적삼 덕분에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어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그렇게 혼자 앉아서 아마 두어 시간을 즐겼을까 싶었는데 배드민턴이 끝났는지 회원들 셋이 나와서 같이 맥도널드로 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한 회원이 갖고 온 음식을 꺼내려니 매장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만,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싶었다. 그들은 성향도 나와 너무 같아 마음 적으로 더 긴밀하게 통하는 것 같아 그야말로 심적인 희열까지 스몄다.

그동안 꽤 여러 차례 봐 오면서 그냥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면 그날은 오랜만에 서로를 알아가는 모임이 된 것 갚아 더 반가운 마음이었다.

늘상 같은 일상인 것 같고, 만나는 사람도 같은데도 가끔은 대화의 주제가 다르기도, 그 얘기에 따라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게다가 얘기를 하다가 바쁜 일이 있어 얘기는 다음에 하고 또 만나자고 하며 헤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그날의 화제는 그걸로 끝나버리고 마는 경우를 종종 만나곤 한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했던지라 그날그날 그 분위기에 집중하려 아니, 화자의 얘기에 공감하려 귀를 기울인다.

칠십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많은 만남, 얘기,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기에 생각나는, 추억되는 장면이 별로 없다는 것인지 그래서도 순간순간, 오늘, 지금을 가슴에 담는다. 

어쨌든 그날 같은 날은 내 일상에서 없던 날이기에 집에서 혼자 있었다면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오래도록 기분 좋게 간직될 ‘선물’을 받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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