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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미 구스의 단장지애

김채형 2024-11-26 0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리치몬드힐에 있는 공원의 호수에 가면 수없이 많은 구스가 헤엄을 치며 동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걸 볼 수 있다. 계획을 짜고 역할을 정하는 듯 함께 남쪽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구스들이 그 호수에 내리고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다. 그들이 호숫물 위를 유영하다가 사뿐히 떠오르거나 두 다리를 앞으로 뻗고 호숫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물살을 가르며 내려앉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실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몸짓을 보노라면 잠시나마 삶에 지친 내 영혼이 위로받는 듯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여름날에 있었던 어떤 어미 구스에 대한 안타까웠던 기억도 함께 떠올리게 되어 마음이 아파지곤 한다.

그해는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더니 유월에 들어서면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온 대지가 타는 듯 생기를 잃고 바삭거렸다. 건조한 바람이 불 적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나는 늙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겠다고 더위를 무릅쓰고 일주일에 세 번씩 웰컴센터로 가곤 했다. 그날도 나는 차에서 내려 등 뒤로 서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볕을 받으며 센터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같이 넓은 주차장에 달랑 나무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 주변에 모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보니 어미 구스 한 마리가 그 더위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듯 웅크리고 앉아 헉헉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변 가까이에 머물며 먹이를 챙겨주고 알과 어미를 지켜주어야 할 수컷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알도 달랑 하나였다.

어쩌다가 홀로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저러고 있는 것인지 나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녀석이 의지로 삼은 나무는 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늘을 짙게 만들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파리까지 엉성해서 녀석은 뜨거운 햇볕 속에 노출된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 받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 같았다.

녀석이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 나무가 심어진 곳은 콘크리트로 사면을 화분같이 높게 올려서 만든 조그만 화단이었다. 아마도 그런 구조 때문에 알을 지키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오가는 길목이어서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쓰럽고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돌아보며 주차장을 나왔다.

다행히 사람들이 오가며 먹이와 물을 가져다주고 응원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수업 시간은 물론 학생들이 모이기만 하면 서툰 영어로 온통 그 녀석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다들 무사히 새끼가 태어나기만 바라는 마음이었다.

녀석이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낸 보람으로 드디어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새끼가 나오는 순간에는 어미가 그 자리에 없었던 듯싶었다. 극심한 갈증에 목을 축이러 잠깐 자리를 뜬 건 아니었을지. 오호애재라, 이를 어쩌면 좋을까, 어떤 개구쟁이 악동 놈이 막 알에서 나와 어미를 찾으며 삐악거리는 새끼를 들고 가 버렸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있었던 걸까, 마침 내가 그 현장을 지나치게 되어 목격한 장면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표현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에 견준 우리네 부모의 슬픔과 무엇이 다를까, 비통하고 절망에 빠져 황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어미 구스의 모습. 얼마나 찾아 헤맸던 걸까, 곧 쓰러질 듯 보이는 그의 몸은 후줄근히 젖은 채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두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어찌 그리 잔인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갓 태어난 새끼를 그 어미에게서 떼어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어미 품이 아닌 인간의 손에서 살 수는 없을 터, 진정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 어미와 새끼에게 준 상처는 우리 인간이 마음으로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보호한다고 법을 만들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인간과 구스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위한 구경거리나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학살하고 괴롭히는 상반된 행동을 보여준다.

그들을 위한다고 큰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 그들만의 고유한 생태의 법칙을 침범하지 않는 거, 새끼를 건드리지 않는 거 그거 하나면 되는 게 아닌가. 그건 아주 작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최대의 배려가 아닐까.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때의 어미 구스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아이들을 올바로 교육하고 있는지, 야생과 공존의 삶을 지향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깊이 각성해야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부디 그 어미 구스가 살아있기를, 그리고 해마다 남쪽으로 향하는 그 호수의 무리 속에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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