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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중앙일보
종교 칼럼

울지 말라

정재천 2022-02-23 0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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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늘 유대, 사마리아의 북쪽 갈릴리에 나인성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 성에 한 명의 과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사랑하는 아들을 오늘 잃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이 여인에겐 그 아들이 자신의 유일한 기쁨이고 희망이며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수 많은 인파가 한 명의 과부를 위로하기위해 끝없는 행렬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모인다 해도 누구도 이 여인이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인은 슬펐습니다. 너무나 슬퍼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말없이 자신의 죽은 아들이 누워있는 관을 들고 가는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주님의 마음에까지 닿은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로 오신 주님께서는 나인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애도의 행렬을 발견하시고는 그 과부에게 다가갑니다. 과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시더니 그녀에게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죽은 아들이 누워있는 관에 손을 올려 놓습니다.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을 율법이 엄격히 금하는 일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랬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주님이 그 죽은 청년이 마치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죽었던 시체에 호흡이 돌아오고 혈색이 돌아오더니 그 청년이 급기야 스스로 앉기도 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말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주님은 그 어머니에게 다른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녀에게 청년을 건네 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다른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과 다른 매우 특별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어디에도 누구의 믿음을 보시거나 누구에게 부탁을 받거나 하신 점이 없으신 데도 죽은 청년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둘째,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청년이지만 주님이 처음부터 관심을 쏟으신 것은 그의 어머니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셋째, 슬퍼하는 과부나 그 청년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나 이름이 없으며 심지어 기적 이후의 이야기도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기적 이후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그들 중에 선지자가 있다는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만이 실렸습니다. 그래서 과거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을 연상케 하는 이 기적은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일화로 남습니다. 


때로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무명함과 우리의 평범함이 우리를 슬픔 속에 고립된 존재로 여기게 할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처지를 아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깊은 슬픔에 잠기다 보면 어디에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는 고독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의 처지나 신앙, 우리 자녀의 믿음, 심지어 우리의 앞으로의 신앙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아플 때 그것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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