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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던진 화두, 자유민주주의

진중권 2021-03-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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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사퇴했다. 벌써 견제가 시작됐다. “정치인 윤석열은 검찰 부하들, 새로운 친구들(진중권·금태섭·박준영 등)과 손잡고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을 것 같다.”(김용민 의원) 나도 모르는 새 ‘새 친구’가 생겼다. 윤 전 총장을 겨냥한 여러 비난 중 인상적인 글을 발견했다.


민주주의에 자유주의는필요 없다?

“윤석열이 사퇴 쇼를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다. 황교안과 진중권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투사’가 되겠다고 한다. 이들은 그냥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고 꼭 그 앞에 ‘자유’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마치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앙꼬 없는 찐빵이요 영혼이 빠진 육신인 양 말한다.”


정승일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말이다. 진영을 대표할 만한 인물은 아니나, 그의 글에는 실세 586 세력과 그 밑에서 어용질 하는 퇴보진영 인사들의 멘탈리티가 잘 드러나 있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당연히 ‘앙꼬 없는 찐빵’이지, 오늘날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도 있단 말인가. 뭔 소리일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역사적·사상적 계보와 개념이 사뭇 다르다. 민주정은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비롯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 공화국을 누구도 자유주의라 칭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계보를 잘못 알았던 게다. 그의 믿음과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정과는 아무 혹은 거의 관계가 없다.


근대 시민혁명이 모범으로 삼은 정체는 아테네가 아니라 로마의 공화정. 그 시절 로마는 민주정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로마를 모범으로 내세운 것은 당시로선 군주의 사적 소유였던 국가를 인민의 공적 소유로 돌리는 게 혁명의 최고 과제였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공적 사안(res publica)이라는 뜻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적?

정승일은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본다. “19세기 내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재산·자산이 없는, 적은 이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운동에 반대했고, 여성들에게 선거권 주기를 거부했다. 자유주의는 늘 특권적·귀족적 민주주의, 제한된 민주주의(재산 많은 남성 백인)였다.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어이가 없다. 19세기 초 뉴욕주 헌법 제정회의에서 이른바 켄트-부엘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끝에 “뉴욕 헌법은 자산 소유에 기초한 시민권의 ‘공화주의적’ 정의를 개인의 법적 자율성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정의로 대체했다.” 보통선거권의 도입은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개혁으로 여겨진다.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 선거권을 거부했다는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밀은 1866년 하원에 여성 선거권을 보장하라는 청원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는 성차별이 “그 자체로 잘못이며 인간 계발의 주요 방해물”이라며 양성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역사는 동시에 자유주의의 역사였다.


반면 정승일의 모범 아테네 민주정은 노예·여성·식민지 주민을 배제했다. 비범한 개인을 도편 투표로 추방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선동당한 대중의 요구로 무고한 장군 8명을 처형했다. 아테네 민주정이 시민혁명의 모델이 되지 못한 것은 중우정치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민주정의 이 고질병은 자유주의라는 견제장치가 없어 발생한 현상이다.


자유민주주의는물신숭배 사상?

정승일에게 자유주의는 나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실체는 자유주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시장주의(시장을 지고지순한 가치로 숭상하는)이며 자본주의(자본을 지고지순한 가치로 숭상하는)이고 따라서 물신숭배(시장과 자본이라는 물-thing을 신처럼 숭상하는) 사상이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를 돈 내고 돈 먹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와 동일시한다.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지. 적어도 대공황 이후 현대의 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며, 심지어 경제적 평등의 의제까지 수용한다. 현대의 자유주의는 유럽의 ‘사회국가’에서처럼 사회주의와도 결합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가리킨다. 미국은 물론이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유럽 국가들도 모두 이 자유민주주의를 정체로 채택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국가는 북한하고 이란뿐. 하긴, 물신 대신 신을 숭배하는 나라이니 인민들 영성은 깊겠다.


자유민주주의 대 인민민주주의

이렇게 자유주의를 배척하면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의 동의어로 전락한다. “1863년 미국 대통령 링컨이 정의했듯이 민주주의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이다. 굳이 인민·민중을 붙여 인민민주주의 또는 민중민주주의라고 할 필요도 없이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인민권력·민중권력이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어이, 얼치기 좌파·우파들아, 미국 가서 링컨부터 공부하고 오시지 그래?” 얼치기 안 되려고 공부를 좀 해봤는데, 인민권력의 주창자 링컨은 ‘인민’의 범주에서 흑인을 배제했단다. 당시 흑인 참정권을 주창한 것은 외려 랄프 월도 에머슨, 찰스 섬너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아직도 쌍팔년도 운동권 사고에 빠져 있으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당연한 말에 발끈할 수밖에. 문제는 이 증상을 그만이 아니라 집권 586 세력 전체가 공유한다는 데에 있다. 민주주의를 윤 전 총장은 자유민주주의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민민주주의로 이해한다. 그러니 충돌은 예정된 셈.


반(反)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보완적 관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이 다수의 폭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개인의 자유, 소수의 존중 등의 자유주의 원리로 견제한다. 하지만 전체주의자들은 그 둘을 적대적 관계로 간주한다. 이 반자유주의 민주주의의 대표자가 바로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다.


말이 ‘인민 권력’이지 히틀러는 43% 득표로 집권했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이 43%의 뜻을 ‘인민의 일반의지’와 동일시한다는 데에 있다. 거기에 반대하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고작 41%의 득표로 집권한 대통령 밑에서 ‘토착왜구’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법치를 파괴한다.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제약은 ‘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고전적 자유주의의 신념. 전체주의자들에게 이 신념은 낯설다. 그들에게 법이란 개개인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다. 인민 권력(“선출된 권력”)을 빙자해 사익을 취하는 수단일 뿐.


그래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법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만드는 해괴한 법안들, 법무부 장관들의 초법적 행태들, 자신들만 법의 예외로 두겠다는 검수완박. 이 모두는 운동권 시절에 형성된 낡은 인민민주주의 관념이 ‘법의 지배’라는 자유주의 원칙과 충돌하는 현상이다.


파괴된 법치주의 시스템

그 충돌이 검찰총장의 사퇴를 낳았다.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법이 부여한 저의 마지막 책무를 이행하려고 합니다.” 법치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핵심가치. 법치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파괴된다. 그래서 법치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헌법적 책무라고 한 것이다.


윤 전 총장은 떠나며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6.6%가 이 발언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공식적 인민의지로 통하는 것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37.6%의 의견. 그 잘난 인민권력이 실제론 소수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진중권 같은 얼치기 좌파들은 그런 민주주의는 자유 없는 민주주의이므로 인민민주주의라고, 종북세력이라 비난한다.” 왜 거짓말을 할까? 그동안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종북이 아니라고 말해 왔다. 왜? 잡범을 사상범으로 대우해 줄 필요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표창장 위조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나랏돈 삥땅하고, 위안부 할머니 등치고, 사기꾼에게 돈 받고, 댓글 조작하고, 선거 개입하고, 감찰 무마하고, 음해 공작하고, 블랙리스트 만들고, 택시기사 폭행하고, 여직원 성추행하고, 돈은 어디서 났는지 제 자식 미제의 심장부로 유학 보내는 잡것들에겐 ‘종북’도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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