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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배려와 관용이 남아있는가

김종회 2024-05-05 0

갈색의 긴 머리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성이, 붉은색 망토를 두른 백마를 타고 가는 그림이 있다. 1898년 영국의 화가 존 콜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다. 얼핏 보면 고급한 춘화를 연상하게 하는 선정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11세기 중엽 영국의 전설적인 귀부인 고디바에 관한 고결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디바는 당시 코벤트리 지역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의 어린 아내였다. 칠십 노인인 백작은 전쟁 준비를 위해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겼고, 열여섯 꽃다운 나이의 아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금을 낮추어 달라고 간청했다.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백작은 장난삼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농민 사랑이 진심이라면 그 사랑을 실천해 보여라. 만일 당신이 완전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그리고 농민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의를 지킨다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 그런데 고디바는 정말 그렇게 했다. 영주 부인의 소문을 들은 농민들은 감동하여 집집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려, 어린 숙녀의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이 전설적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고디바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야기의 곁가지로 톰 브라운이라는 양복점 직원이 커튼 사이로 그녀를 몰래 훔쳐보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피핑 톰(peeping Tom, 훔쳐보는 톰)’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관음증의 상징어가 되었다. 결국 고디바는 세금 감면에 성공했고, 아내의 용기와 선행에 감화된 백작이 선정을 펴게 됐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오늘날에도 코벤트리 지역의 상징은 말을 탄 여인이고 그 모형의 동상도 서 있다. 고디바의 감동적인 일화는 지금까지 유럽 전역에서 그림, 조각, 문학작품, 장식품, 이벤트 행사 등에 널리 소재로 사용된다. 특히 1926년 벨기에의 한 초콜릿 회사가 자국의 문화적 전통에 이 일화를 결부하여, 고디바를 상품의 표제로 삼았다. 품격 있는 포장지와 우아한 문양의 조개껍질 디자인을 갖춘 고디바 초콜릿은 세계적인 명품이 되었다. 


동양문화권, 특히 한문문화권에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저술 가운데에는 중국의 4대 기서(奇書)를 빼어놓을 수 없다. 이른바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그 제목들인데 이 중 『삼국지연의』에는 3천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위•오•촉한 등 3국 시대의 파란만장한 사회상과 처세 철학을 수놓고 있다. 여기서 더 범위가 확장된 중국 역사가 『열국지』다. 거기에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걸출한 인품의 주인공들이 처처에 모래밭의 사금처럼 널려 있다. 『열국지』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인 초나라 장왕의 이야기다. 

어느 날 장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밤중에 촛불을 휘황하게 밝힌 다음 연회를 베풀었다. 그 중도에 느닷없이 일진광풍이 불어 불을 모두 꺼버렸다. 온 주석이 어둠에 잠겼다. 그러자 신하 한 사람이 술기운으로 장왕이 총애하는 애첩의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신하의 갓끈을 뜯어 쥐고서 어서 불을 밝혀 갓끈의 임자를 찾으라고, 자신의 지혜와 정절을 자랑했다. 장왕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신하가 스스로 갓끈을 뜯어버리게 했다. 취중의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고, 색출할 수도 있는 범인을 즉석에서 사면한 셈이다. 


많은 나날이 지난 다음 장왕이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장수가 목숨을 내던져 장왕을 구출하고는 부상으로 숨지게 되었다. 장왕이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생명으로 나를 구했는가?” “왕이시여, 제가 바로 옛날의 연회 때에 갓끈을 빼앗겼던 자입니다. 그 은혜를 이제야 갚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을 금도(襟度)라 부르는데, 역사는 장왕의 금도를 실증한 그날의 연회를, 끊을 ‘절’, 갓끈 ‘영’자를 써서 절영연회(絶纓宴會)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남을 용서하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자신의 큰 잘못은 쉽게 용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에 석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보면,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성경의 비유가 뼈아픈 채찍이 아닐 수 없다. 참된 용서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이 이 논리적인 용서의 방식을 체현하고 실천하기란 실로 만만한 것이 아니다. 참된 용서를 실천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개인에게나 공동체에게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극명하게 두 동강으로 갈라놓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또한 상대방 진영을 이해하거나 용서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기에 발생한 비극이다. 보수에도 건전한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진보 역시 그렇다. 한 나라가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질서와 국량(局量)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경향이 서로를 용납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정치가 그만한 역량의 전개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나 말의 정치다. ‘선한 정치란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란 상식은 배려와 관용의 정신에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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