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에서 차로 8시간 남짓 미 국경 넘어 도착할 수 있는 휴양지 브래튼우즈에서는, 2차대전이 끝날 즈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세계평화와 자유무역 증진을 위해 논의한 끝에, 미국 달러를 전 세계인들이 사용할 기축통화로 지정한 것인데요.
지금의 유로화와 같은 세계 공용화폐를 새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으나,미국은 이를 묵살하고 달러를 기축통화로서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이 내건 전제조건은 달러를 금과 연동(금본위제) 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에서 금을 보유한 만큼만 달러를 찍어낼 것이고, 언제든 달러를 가져오면 금과 바꿔 줄 테니 미국 돈을 세계화폐로 사용해 국제무역을 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전 세계는 그때부터 미화를 기축통화로써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속은 1971년 8월 1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의 ‘더 이상 미화를 가져와도 금하고 안 바꿔 주겠다.’는 (닉슨쇼크) 배 째라 혹은 막가파식 발표와 함께 깨지게 되었습니다.
개인들 간이나 기업들 사이라면 계약을 위반한 셈이니 소송전이라도 펼칠 판국이었겠지만, 지구촌의 국가 간 송사를 판결해 줄 독립된 슈퍼법원은 존재하지 않으니 세계 각국은 그저 브레튼우즈체제에서 탈퇴하는 정도밖에는 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 달러는 이제 금하고는 상관없는 종이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는 빠른 속도로 급강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피땀 눈물 갈아 넣으며 긴 노동시간을 투입해 만든 제품을 인쇄기를 돌려 순식간에 찍어낸 돈으로 편하게 구매할 수 있어 왔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1973년도 들어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졌고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자, 사우디를 수장으로 하는 OPEC은 군사력에서 상대가 안 되니 석유를 무기화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는 원유 수출을 안 하겠다’ (금수조치) 선언해 버립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에어컨 끄고 파리채를 들게 만들었다는 제1차 오일쇼크의 서막이 열릴 것입니다.
오일쇼크는 기름값을 단기간에 4배 이상 올렸고 전 세계는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참으로 희한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편에 서는 나라들한테 석유를 안 팔겠다 으름장을 놓으며 적대적인 행동에 나섰던 사우디가, 앞으로는 ‘석유를 사고 싶으면 미국 달러만 돈으로 인정할 테니 미화만 가져와라!’ 발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 물건 파는 데 적국의 돈만 받겠다니,거의 동일한 시기에 일어난 ‘적과의 동침’ 상황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어렵지만 지금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와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다음 칼럼에 계속..)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