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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의 추억과 교훈

김 기 원 2025-09-19 0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노라면 어릴 때 집에서 쓰던 양은주전자와 겨울철에 초등학교 교실 난로 위에 있던 큼직한 주전자가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같은 삶을 살다가 57세에 병사하신 아버님과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오버랩 되어서 입니다. 

아버지 술 심부름과 농번기 때 들녘으로 물과 술을 담아 번질나게 실어 나르다 보니 성한 곳이 없었던 양은주전자.

아버지의 삶이 그랬습니다. 

성정이 착하셔서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하는 사업마다 망조가 들었고, 7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온전할 리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양은주전자처럼 망신창이가 되어 급기야 간경화란 중병을 얻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니 오호통제입니다. 

그리 가신 아버지가 너무 안타깝고 서러워 한동안 속 울음을 달고 살았습니다.

겨울철 초등학교 교실 난로 위에 덩그러니 있던 녹슬고 일그러진 주전자는 낡아서 볼 품 없었지만 주전자 뚜껑과 주둥이 사이로 몽실몽실 올라오는 수증기가 학동들의 언 몸을 녹였고, 온기가 스며든 아이들 가슴엔 꿈과 희망이 수증기처럼 피어 올랐습니다. 

어떡하든 아버지보다 더 잘 살아야지 하는 결기와 오기가 보릿고개를 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처럼 거듭나게 했고 단단하게 했습니다.

각설하고 주전자는 열고 닫는 뚜껑과 별도의 주둥이와 손잡이가 있는 주방용기입니다. 

주전자의 주된 소임은 필요한 물을 끓이는 일과 물이나 술 등 액체를 담고 이를 사용자들이 마시기 좋게 주둥이로 찻잔이나 컵 등에 붓는 일입니다. 

이 때 자칫 잘못하면 물과 술이 잔에 넘치거나 잔 밖으로 쏟아질 수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렇듯 주전자는 자기 것을 내어줄 때마다 몸을 숙이고, 가진 걸 다 줄 때까지 몸을 숙이고 또 숙입니다.

꼿꼿한 자세로는 주고 싶은 걸 줄 수도 없고, 받고 싶은 걸 받을 수도 없으니 당연지사입니다.

선인들은 문중의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높은 직위에 오르면 집안 어른이 이들에게 ‘주전자처럼 겸손하게 처신하라’하라고 신신 당부했다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렇듯 겸손이란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숙이는 겁니다.

거만과 교만과 오만에 물들지 않고, 상석과 특별대우를 사양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처신하는 겁니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처럼 돈을 벌면 벌수록,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과 마음을 숙여야 합니다.

낮은 자세와 겸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제10대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입니다.

그의 대학 은사였던 ‘라비스 박사’의 교육 50주년 기념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라비스 박사가 답사를 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객석으로 뛰어갑니다. 지난날 자신의 제자였지만 지금은 자국의 대통령이 된 레몽 푸앵카레가 내빈석도 아닌 학생 석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라비스 박사가 대통령의 손을 잡고 단상으로 모시려 하자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선생님이십니다. 저는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로서 선생님을 축하해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 제가 감히 선생님이 계시는 단상에 오르다니요.’ 하며 정중히 사양합니다. 

라비스 박사는 할 수 없이 단상으로 올라가서 감격적인 답사를 합니다. ‘저렇게 훌륭하고 겸손하신 대통령이 나의 제자라니 꿈만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저런 대통령이 있으니 프랑스는 더욱 부강해질 것입니다’라고.

감동입니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대통령 그런 정치인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당찮은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커피포트와 예쁜 물병이 주전자를 대신하는 시대라서 그런지 자신을 낮추는 위인을 보기 힘듭니다. 

기득권과 탐욕을 내려놓기는커녕 되레 강화하려는 몰염치의 세상입니다.

바꿔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주전자처럼 주전자같이 행하는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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