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브리 덴(Dobry Den)!' 체코어로 '안녕하세요'란 뜻이다. 필자가 25년 전에 가 본 체코 수도 프라하는 블타바강 (몰다우강)이 가로지르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엔 별칭도 많다. 프라하의 아름다움에 반한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북쪽의 로마'라고 예찬했으며, '100개의 탑의 도시' '건축의 박물관' '유럽의 음악학교' '유럽의 심장'으로도 불린다. 12세기 로마네스크, 14세기 고딕, 17세기 바로크, 그리고 19~20세기의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 등이 혼재돼 있는 보석 같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트로야 성(Troja Chateau), 구시가 광장에 있는 틴 성당(Tyn Cathedral), 프라하성(Praha Castle) 안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을 비롯한 댄싱 하우스(Dancing House) 등 고대와 근대를 아우러는 건축양식의 보고(寶庫)일 뿐만 아니라 즐비한 박물관 및 예술공연장들, 그리고 소련제 탱크에 짓밟히고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의 환희를 지켜본 역사적 장소인 바츨라프 광장(Vaclavsky Namesti), 숱한 카페와 고미술상점가 등등 구석구석마다 그 매력과 마법을 듬뿍 뿜어내는 중세의 신비를 간직한 천년의 도시다.
먼저 블타바강을 끼고 있는 성베드로•성바울 성당 옆에 있는 비세흐라드 공동묘지(Vysehrad Cemetery)에 가보면, 체코 민족음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의 무덤이 있다. 스메타나는 그의 대표적 오페라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 (1866)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곡가이다. 매년 5월 스메타나를 추모하는 음악축제 ‘프라하의 봄’(Praha Spring)은 그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체코어 'Ma Vlast'•1879)으로 그 서막을 연다. 그 중 2악장 '몰다우강'을 듣고 있노라면 각자의 고향을 흐르고 있을 강물이 그리움처럼 밀려들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낭만파 거장이자 보헤미안 음악의 대가인 드보르자크(Antonin Leopold Dvorak, 1841~1904)의 흉상이 조각된 무덤도 거기 있다. 그는 '슬라브 무곡'(1878), '신세계 교향곡'(1893), '유모레스크'(1894) 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는 블타바 강변의 한 여인숙집 아들이었다. 특히 그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 라르고'를 들으면 순수했던 옛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향수가 절로 묻어난다.
▲ 체코 프라하 비세흐라드 공동묘지에 있는 드보르자크의 흉상이 조각된 무덤
다음은 프라하 모차르토바 1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베르트람카 빌라'(Bertramka Villa)로 가보자. 이곳은 1787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가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를 완성하고, 프라하 에스테이트 극장(Estates Theatre)에서 세계 첫 공연을 할 때까지 기거했던 곳으로, 지금은 모차르트와 원 소유주이며 음악가였던 듀섹(Dusek) 부부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7개의 방이 있는데, 당시 쓰던 하프시코드와 현악기 등과 직접 쓴 편지, 부인 콘스탄체 사진, 돈 조반니 공연 관련 광고 및 기사 등을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한가지 관심을 끈 것은 벽에 걸린 액자 속에 들어있는 말총같이 보이는 물건이었다. 뭔가 신기해서 보니까 모차르트의 긴 생머리카락 13가닥을 모아 묶어놓은 것이었다. 색깔이 바래서인지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흰색이 도는 갈색머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최고작품상을 포함한 8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던 1984년 밀로시 포먼(Milos Forman, 1932~2018)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는 프라하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이제 체코 프라하성 내에 있는 황금골목길(Zlata Ulicka, Golden Lane)로 옮겨 가보자. 이 황금소로는 성 이르지 성당(Church of St. George) 뒷편의 성벽에 붙여 지은, 높이가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집들이 또닥또닥 붙어 늘어섰는데 집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22번의 푸른색 집이 1916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작업실로 사용했던 집이라는데 막내 누이동생이 마련해 줬다고 한다. 유난히 작아보이는 카프카의 집에는 금동으로 카프카의 집이라는 문양이 선명히 새겨져 있고 지금은 그 안에서 카프카 관련 서적이나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당시 유행하던 셀린 디옹(Celine Dion)의 'Power of Love'가 힘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프카는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예언한 천재였다. 이 집에서 많은 단편소설들을 완성했는데 그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사후 출판된 '심판'(1925)과 프라하성을 모티브로 한 '성'(城•1926) 같은 작품에는 당대의 '절망과 고립 의식'이 실존적으로 녹아 있다. "나는 내 묘지명과 같다…."
이어서 구시가 광장으로 들어서다 보면 성 니콜라스 성당(St. Nicholas Cathedral) 뒷편에, 유대인과 체코인의 경계선에 선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카프카의 생가를 보게된다. 그 모퉁이에 '프란츠 카프카 1883년 7월3일 여기서 태어나다'는 뜻의 체코어와 그의 얼굴이 양각된 플레이크가 붙어있다. 생가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그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가 나온다. 그는 만 41세를 한달 못채우고 짧은 생을 마감했으며 프라하 신 유대인묘지(sector 21, row 14, plot 33)에 묻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프라하는 카프카고 카프카는 프라하다"라고 말했던가!
그보다 반세기쯤 뒤에 태어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23)도 체코 사람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4)에서 그는 말했다.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역사 또한 견딜 수 없이 가볍다. 새털처럼 가볍다…." 1988년에 동명의 영화가 필립 카우프만(Philip Kaufman) 감독에 의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영화에서, 대니얼 데이-루이스(Daniel Day-Lewis, 뇌 외과의사 Tomas역)와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 Tereza역), 그리고 레나 올린(Lena Olin, Sabina역)이 열연하였다.
구시가 광장에는 얀 후스(Jan Hus, 1369~1415) 동상이 먼저 반긴다. 후스는 마르틴 루터, 캘빈 등에 영향을 미쳐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한 첫 선구자로서 당시 프라하 카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로마 가톨릭 교리를 거스른 이단자로 지목되어 45살에 화형을 당했던 인물이다. 동상 뒷편에 그가 죽기 직전에 설파한 '진리에 대한 7가지 제언'이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어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사수하라."고….
▲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Old Town Square) 입구에 1915년 건립된 얀 후스(Jan Hus) 동상.
2개의 고딕탑이 솟아있는 틴 성당과 천문시계탑이 있는 구시가광장에는 예술인들의 퍼포먼스가 한창이다. 거리의 악사, 판토마임, 인형극, 즉석 화가 등…. 천문시계탑은 정시마다 좌우 2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의 12제자가 좌에서 우로 천천히 이동한 뒤 고작 1분 여만에 '삐리릭' 소리를 내며 창이 닫혀버려 기다림에 비해 너무 짧아 아쉬웠다.
끝으로 카를교(Karluv most)로 가보자. 길이 621미터, 폭 10미터, 16개의 아치형으로 구성된 다리로, 14세기에 세워졌다. 특히 다리 양쪽으로 늘어선 30개의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모두 새까만데 그 중 '네포묵의 요한(John of Nepomuk)' 동상 밑에 있는 동판만은 빛난다. 그가 카를교에서 블타바 강 속으로 던져지는 순교 장면을 새긴 것인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쓰다듬어서 거기만 반짝인 것이리라. 이 다리 위에서의 퍼포먼스도 구시가 광장과 비슷했는데, 특히 클래식 기타곡에 절묘하게 맞추는 마리오네트(marionette) 연기를 잊을 수가 없다. 카를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스메타나 박물관이 있다.
갈 길은 바쁜데 숨이 차다. 천년의 도시를 어떻게 하루 이틀만에 다 볼 수 있으랴. 사업 목적으로 이틀간 방문했던 프라하였는데 이런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길바닥에만 하루가 꼬박 소요될 왕복 800여 km를 시속 210km로 달려준 ― 속도계기의 최고속도 눈금이 220㎞이었다. 목숨을 건 모험이었지만 카레이서 출신이라 믿긴 했었다 ― 현지 후보사 체코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저 멀리 보이는 언덕마다 건초를 태우는 불연기가 치솟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5월의 봄을 축복하기 위한 체코 전통민속이라고 한다. 마치 우리 어렸을 때 정월 보름날 달집태우기를 연상시키는 장관이었다.
프라하는 정말 다시 가고픈 매력있는 도시다. 안부를 묻는다. ‘도브리 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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