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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해피 벌써데이! - 나운택

2020-07-08 0

 특별히 바쁜 일도 없고 무료하게 느껴질 때면 가끔 여러 가지 중고물품들을 파는 가게에 들르곤 한다. 딱히 뭘 사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심심풀이로 이것저것 뒤적여 보고 집적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양한 옷가지에서부터, 전자제품, 생활용품을 비롯해 온갖 잡동사니들을 파는 벼룩시장 같은 곳이지만 내가 주로 기웃거리는 곳은 책, CD, DVD, LP를 파는 코너이다. 대개 한 일이십분 두서없이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지만, 별생각 없이 느긋하게 뒤적이다 보면 가끔은 의외로 괜찮은 것들을 건질 때도 있다.


 오늘도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가게 앞을 지나게 되어 별생각 없이 들어가 CD 진열대를 뒤적이다가 클래식 기타 연주 CD가 몇 개 눈에 띄어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CD들을 스캔하던 점원이 막 지갑을 꺼내드는 나에게 불쑥 “시니어 디스카운트?” 하고 물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난생처음 받아보는 질문에 순간 당황스러워 멈칫하다가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귓속에서 크게 울려 나도 모르게 “예스!”라고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가게 문을 나서면서 내 지갑은 웃고, 내 가슴은 울었다. 내가 벌써?... 된장!


 어릴 때는 그렇게 더디게 흐르던 세월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탄력을 받아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주 어지러울 지경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을 채 따라잡지 못한 내 마음은 아직도 사십 대 후반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어느새 그 빠른 세월을 다 따라잡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의 카톡 프로파일 사진들이 하나둘씩 골프장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멋진 폼으로 찍은 사진에서 손주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던 게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와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방금 산 CD를 들으며 하릴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습관적으로 유튜브를 뒤적인다. ‘다리에 쥐가 났을 때 5초 만에 푸는 법’, ‘독소를 파괴하는 음식’, ‘100세 시대 행복하게 사는 법’, … 그 아래엔 법륜스님 ‘즉문즉설’이 주르륵 뜬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는 게 재미가 없고 허무해요’, ‘아내와 아들이 싸워요’, ‘죽고 나면 어떻게 되나요?’, ‘중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내가 이혼을 원해요’… 문제없는 사람이 없고 괴롭지 않은 이가 없는 듯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스님은 어찌 저렇게 문제의 핵심을 콕 집어내어 해답을 주는지… 부지런히 따라 하기만 하면 건강하고 즐겁게 100살까지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카톡이 울린다. 누군가 ‘고령화사회 일본 여행 중  선술집에서 본 글귀’를 단톡방에 띄웠다.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가 숨 막히는 81세, 아무것도 모르는 18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찾아 나서는 81세, ......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다.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피식 입에서 빠져나오는 이 소리를 웃음이라 해야 하나…? 


 또 다른 단톡방에는 ‘2019년도 총인구 통계’가 올라와 있다. 내가 알던 인구 3위 도시가 어느새 4위로 밀려나 있고, 4위 도시는 6위로 내려앉았다. 연령별 생존 확률 70세 86%, 75세 54%, 80세 30%, 85세 15%, 90세 5%. 확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균 나이는 76-78세. 자세히도 알려준다. 그러니까 내가 내년 이맘때까지 숨을 쉬고 있을 확률이 얼마라는 얘기야? 내게 남은 세월이 도대체 얼마쯤이라는 거야?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켠다. 페이스북이 뜬다. 옛 직장동료 페이스북 친구의 새 포스팅이 올라와 있다.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옛 직장동료가 영면했다며 흑백의 국화 그림을 올려놨다. 수년 전 엘에이에 갔을 때 만나서 같이 점심 먹으며 이민생활의 애환을 나눴던 친구다. 그 씩씩하고 서글서글한 친구가 선물한 테낄라 큰 병의 마지막 잔을 비운 게 몇 달 전인데…


 페이스북의 한 쪽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떠 있다. “오늘 생일을 맞은 ㅇㅇㅇ님에게 축하하는 마음을 전해 주세요” 친구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낸 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 본다. “친구야, 해피 벌써데이! 건강하시게!” 친구의 프로파일 사진 속에서 손주의 해맑은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산문가 나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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