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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를 부은 죄인 여인(눅7:36-50) - (2) 그가 받은 용서, 그가 흘린 눈물

이홍우 2024-10-25 0

향유를 부은 죄인 여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그 여인은 무슨 연유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집주인과 타인의 눈총을 받으며 격한 눈물을 예수님의 발에 떨구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녀의 눈물이 그가 받은 용서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할 뿐, 그녀의 눈물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 여인은 창녀임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당시에 흔했다는 생계형 몸 파는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편이 사고나 병으로 먼저 죽고 홀로 자녀를 키워야 하는 형편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일자리도 변변히 없던 사회에서 막다른 골목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오직 어린 자녀의 허기진 배를 채워 잠자리에 뉘여야 하는 절실함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독히도 기구한 운명의 덫에 걸리고 만 자신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세상은 그녀를 죄인으로 낙인 찍고,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키며 고상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멀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깊은 울림이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녀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가 견고히 나뉘어 있던 세상, 웃는 자와 우는 자의 처지가 굳어진 세상, 그런 칠흑같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그녀는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과는 반전(反轉)된 세상,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전이 일어난 세상,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도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던 밥상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가깝게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어떤 용서를 베풀었을까요?  “이제까지의 너의 죄는 어마무시하나 네가 회개한다니 용서한다.  이제 몸 파는 짓을 집어치워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용서는 그녀를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 찍어온 사회통념이나 바리새인의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용서를 선언했을 것입니다.  “나는 너를 죄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네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네가 나빠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너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한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며 으스대는 사람들,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이웃은 굶고 있는데 비단 옷을 걸치고 배불리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없다!”  


예수님은 차별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함께 아파했고, 차별하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비판했습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의 외형적인 죄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원인의 뿌리를 들어내셨고, 겉으로 들어난 증상을 벌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라고 미국의 대표적인 영성가 리처드 로어는 말했습니다.  이야기 속의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종교적 정결지상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 자신이 지었다고 생각한 많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현실의 삶은 버겁지만, 더 이상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한 자락을 당당히 담당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발견이 그의 눈물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녀의 믿음과 그녀가 얻은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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