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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침묵의 가마에서 구워낸 ‘봄의 첫 별빛’

강영자 2026-02-06 0

조선의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던 잿빛 저녁, 한 시대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던 그 찰나에 어둠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빛이 닿지 않은 자리에 남은 그늘은 차갑지 않았다. 오래된 언어의 품처럼 따뜻한 온기 속에서, 낯선 별 하나가 아주 천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한국어는 그 별빛을 품은 채 세월의 강을 거슬러, 우주의 태초 기억을 오늘의 손끝으로 정답게 건넨다.

빛이 찰나의 환희로 번쩍인다면, 어둠은 존재를 묵직하게 발효시키는 침묵의 시간이다. ‘어둠’의 어원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생겨난 ‘더움’의 그림자—빛의 소멸을 예감하면서도 다시 타오를 인내를 품은 성소(聖所)에 가깝다. 한국어는 이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삶의 엘릭서(elixir)를 길어 올린다. 국립국어원 말뭉치가 보여주듯, ‘어둠’은 다수의 경우 그리움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한(恨)을 봄의 정서로 숙성시킨다. 빛보다 더 오래 입술에 머무는 그 묵직한 여운—그것이 한국어만의 사유 연금술이다.

캐나다 겨울 밤의 서슬 퍼런 한기. 창 밖엔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 창백하게 빛나고, 타향 차례상 위엔 작은 등불 하나가 그리움의 향을 피워 올린다. 눈 쌓인 길모퉁이에서 불꽃이 그림자와 밀어를 나누는 밤, 영하 20도의 동토 속에서 등불은 이민자의 가장 충직한 동지가 된다. 어둠은 공포의 심연이 아니다. 빛을 봄 별로 치환하는 마법사의 가마이자, 북미 대륙의 긴 겨울을 황금으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사의 실험실이다. 등불은 어둠이라는 검은 비단 위에 봄의 문장을 수놓는다.

이민자의 삶은 이 연금술이 현실임을 증명한다. 1970년대 캐나다로 건너온 1세대들은 북미의 광활한 황무지를 한반도의 봄 언어로 번역해왔다. 몬트리올의 겨울바람, 토론토의 호수 안개, 오타와 리도 운하의 단단한 얼음—이 혹독한 풍경 속에서도 한국어는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피눈물이 한류의 광휘로 정련되었듯, 『파친코』의 세대적 고독과 『오징어 게임』의 처절한 생존 서사가 세계인의 공명을 얻은 까닭은 어둠이 곧 잉태의 성소임을 증명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는 우리 설날이 간직한 역사적 공식이다.

캐나다 한인 25만 명의 역사는 이 공식의 산 증인이다. 캐나다 전역의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이 서툰 발음으로 우리말을 배우고, 코리아타운에서 어르신들이 차례상 등불을 밝히는 순간, 대륙의 칠흑은 비로소 봄의 별빛으로 물든다. K-팝을 부르며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는, 조선의 등불이 북미 겨울 밤에 다시 만개했음을 증언한다.

등불 없는 어둠은 공허하고, 어둠 없는 등불은 허깨비일 뿐이다. 다이아몬드가 고온•고압의 칠흑을 견뎌 탄생하듯, 우리의 고독은 별빛의 결정체로 빚어진다. 설날 밤, 창밖 어둠 한 줌을 마음의 손으로 움켜쥐고 나직이 선언하라.  

“너는 나의 봄 별이다.”  

그 순간, 캐나다의 겨울은 이미 별빛의 대서사시로 승화되어 있다.

[편집자 주(註)]  

본 작품은 언어의 통계적 사실을 존재론적 사유로 발효시켜, 디아스포라의 시린 겨울을 ‘봄의 성소’로 승화시킨 지성적 서정 산문이다.

강영자 시인(캐나다 거주)은 언어를 조탁하는 역동적 상상력과 존재의 비의(秘義)를 꿰뚫는 엄밀한 통찰을 황금 비율로 교직(交織)해낸다. 특히 캐나다의 혹독한 설한(雪寒)을 인고의 시간을 넘어 ‘봄 태양을 잉태하는 성소’로 재정의한 대목은, 이주민의 고독을 보편적인 삶의 희망으로 변모시킨 이 작품의 백미다.

1부 ‘등불’에서 2부 ‘어둠’을 지나 3부 ‘다이아몬드’로 침잠하는 치밀한 서사 구조는, 속도의 시대에 우리가 망각한 ‘기다림의 미학’에 바치는 시인의 고결한 헌사다. 캐나다 겨울 밤이 별빛 대서사시로 피어나는 이 여정은, 모든 독자의 가슴 속에 잠든 연금술사를 깨우는 나직한 속삭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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