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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을 맞이해 상기해야 하는 가치

윤방현 2026-02-12 0

한국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전수해야  


구정이 다가오면 토론토의 겨울 공기 속에도 묘한 온기가 감돈다. 음력 설은 단순한 명절을 넘어, 이민자의 삶 속에서 정체성과 기억을 불러내는 시간이다. 토론토다인종우호협회는 2월 14일 노스욕 도서관 인근 푸드코트에서 중국계, 베트남계 등 다양한 다인종 이웃들에게 떡과 만두를 나누고, 설날 선물을 증정하며 설맞이 행사를 개최한다. 이러한 풍경은 토론토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다문화 공존의 얼굴을 잘 보여준다. 한인사회 매년 구정을 전후로 한인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설 행사가 열리고, 떡국을 나누며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민 1.5세와 2세가 주류가 된 오늘의 한인사회에서 구정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전통문화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수할 것인가를 묻는 중요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마음 한편에는 늘 쿠바 선교 현장의 기억이 떠오른다. 한인 이민의 역사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선구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하와이 애니깽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을 견디며 이민의 삶을 개척했고, 멕시코를 거쳐 쿠바까지 흘러갔다. 낯선 땅,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그들이 붙들었던 것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었다. 필자 부부가 캐나다 실버선교팀을 이끌고 쿠바 선교에 나섰을 당시, 카르데나스 지역의 한인 밀집 마을에서 한인 후예들을 모아 구정 행사를 연 적이 있다. 떡만두국을 끓여 나누고 윷놀이를 가르치며 설날의 의미를 설명했다. 처음 접하는 한국 전통놀이와 음식 앞에서 현지 아이들과 어른들의 눈빛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빛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쿠바는 흔히 ‘어둠의 땅’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 땅에서도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필자 부부와 이춘수 전 한인회장을 비롯한 실버선교팀은 구정 전후로 쿠바 한인 후예들에게 윷놀이를 가르치고, 떡만두국과 잡채 등 한국 음식을 직접 만들어 전수했다. 이는 단순한 문화 소개가 아니라, “당신들은 어디서 왔는가”를 알려주는 작업이었다. 당시 영락교회와 큰빛교회를 포함해 약 60여 명의 선교팀이 함께했으며, 쿠바의 한인 후예 교회뿐 아니라 도피코 목사와 현지 교인들 역시 이 모든 과정에 깊은 감동과 기쁨을 표현했다. 문화는 국경을 넘고 전통은 언어의 장벽을 허문다. 그날의 떡국 한 그릇, 윷놀이 한 판은 선교의 도구이자 정체성 교육의 교재였다. 정체성은 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체험으로 전수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 이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이민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방향을 잃는 것과 같다. 토론토 한인 이민자들이 음식 나눔을 통해, 명절 행사를 통해 문화를 전승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정은 단지 설날이 아니라, 한국인의 뿌리와 정신을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의 장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영어가 더 편한 2세, 한국을 방문한 기억조차 없는 3세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가. 정체성 교육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설날에 떡국을 함께 끓이고, 그 유래를 이야기해 주는 것, 윷놀이를 하며 ‘모’와 ‘윷’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세배를 하며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작은 체험들이 쌓여 아이들의 마음속에 “나는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자각을 심어준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 속에서 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동화(同化)가 아니라 공존(共存)이다. 올해 구정을 맞으며, 한인사회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전통문화를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 쿠바의 한인 후예들조차 설날의 떡국과 윷놀이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되새겼다면, 이 땅 토론토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더욱 분명한 답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구정은 이민 공동체의 뿌리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미래로 잇는 다리다. 새해의 떡국 한 그릇 속에 담긴 의미를, 다음 세대의 마음속에도 깊이 담아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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