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옥중에서 유관순 열사]
1910년 무렵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주일학교에서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고 다니던 8세의 유관순을 만났다고 한다. 앨리스는 가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양녀로 삼았고 공주로 데려와 같이 살면서 영명학교에서 2년간 가르친 후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시킨다.
앨리스 선교사와 함께 살던 시절에 신학문과 기독교서적, 잔다르크 전기를 접한 것이 유관순의 민족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유관순열사는 이화학당에서 3년간 공부했으며3•1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고등과 1학년이었다.
유관순은 1904년 충남 천안 목천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2녀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 유중권은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받아 들였고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홍호학교를 세워 신교육에 열심하였으나 일인 고리대금업자의 행포와 학교부채로 실패하게 되었는데 구국의 방법과 신념이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조인원(조병옥의 부친)등과 더불어 교회를 중심으로 민중계몽에 노력하였다.
이런 가정 배경에서 자란 유관순열사는 어릴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자라났는데 지령리에 선교차 온 앨리사 샤프 선교사의 눈에 띄어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수학하던 중에 3. 1운동을 맞이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당시에 체포 당했으나 석방되었으며 총독부의 휴교령에 따라 학교가 폐교되자 사촌언니와 함께 천안일대가 아직도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령리교회에서 고을 유지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을 소상히 설명하고 민중궐기를 호소하였는데 이 때 조병옥 (제 4대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의 부친 조인원등이 앞장서서 거사 일을 4월 2일(음력 3월 1일)로 정하고 일경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산골 길을 오르내리면서 연기 청주 진천등의 교회 및 뜻있는 자들을 모아 거사 전날 밤에 수신면 삼마루에 준비완료를 뜻하는 봉화를 올리며 거사 일을 맞이하였다.
거사당일 아오내 장날 정오를 기하여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였고 조인원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유관순의 독립연설이 있은 뒤 시위에 들어갔다.
이 시위에서 일본 헌병대의 총격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체포 되었으며 공주영명학교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나게 된다.
[기독교 대백과 12권-유관순] 참조
경성 복심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중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 1주기에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였고 결국 병을 얻어 1920년 10월 12일 옥사하였다.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 역사] 참조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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