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데이를 맞아 퀸 엘리자베스 웨이를 타고 나이아가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어느 관공서에 조기가 게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크 카니 총리가 캐나다 전국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는 뉴스 기사가 기억이 났습니다. 총기 폭력이 드문 캐나다에서 일어난 학교 총격 사건, 대다수가 열한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인 어린 아이들이 하늘로 간 텀블러 리지 참사 때문이었습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사건과 관련된 새 소식을 찾아보았습니다. 토론토중앙일보에 들어가 보니 마야 게발라라는 열두 살 아이가 기적적인 회복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떠 있었습니다. 임종을 대비하며 장기 이식을 논의하던 중에 자발 호흡을 하며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사의 충격 속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소식에 잠시 그 아이의 회복을 위하여 눈을 감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참사는 듣는 이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만, 특히 아이들과 관련된 참사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 위에 내 자녀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당시 네 살과 두 살이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생존 수영을 가르치려 수영장으로 향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거대한 세상의 파도 앞에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뿐인가 하는 무력감에 젖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마음은 이토록 간절한데, 세상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이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이런 참담한 소식을 접할 때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귀찮게 여겨 꾸짖고 막아섰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심히 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주님께 아이들은 단순한 보호 대상을 넘어, 천국을 소유한 가장 존귀한 인격체였습니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세상의 폭력이 아이들의 미래를 금하고 막아선 비극 앞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그 상처 입은 아이들을 당신의 품으로 오라고 부르고 계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 교회를 처음 찾아온 가정의 자녀들이 생각납니다. 낯선 환경이라 쭈뼛거릴 법도 한데, 아이들은 금세 교회 마당을 제 집처럼 뛰어다니며 꺄르르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예배당 문턱을 넘나드는 그 해맑은 발소리를 들으며 저는 문득 속으로 기도를 삼켰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캐나다 땅이 저 아이들에게만큼은 가장 안전한 울타리가 되게 하소서.’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없는 세상은, 우리 어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야 함을 텀블러 리지의 비극을 보며 다시 한번 뼈저리게 다짐합니다.
아직도 병상에서 회복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마야 양과, 이번 참사로 우리 곁을 떠난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충분히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기적처럼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마야 양에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이 회복의 소식이 절망에 빠진 유가족들과 우리 모두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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