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뒤집어쓰다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토론토 중앙일보
오피니언 종교 칼럼 재를 뒤집어쓰다
종교 칼럼

재를 뒤집어쓰다

김카리스 2026-02-26 0

2월. 부고(訃告) 소식을 들었다. 다까미츠 무라오카 (村岡崇光). 내 책상 위 유리 밑에 끼워 놨던 명함의 그 이름이다. 팔 년 전 토론토 대학에서 열렸던 한 학회에 발표자로 섰던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팔십 일세의 무라오카는 학문의 세계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단지 청력이 좋지 않은 육체의 노쇠함으로 자신이 발표한 내용에 관한 질문은 현장에서 받지 않고 이메일로 보내 달라며 참석한 다른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을 뿐,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 보였다. 학생으로 참가했던 나는 학회 휴식 시간에 그에게 다가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었다. 나의 감사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그의 발표에 대한 것보다 한국에서 한 그의 무료 강의에 대한 것이 더 컸다.


무라오카는 성서 원어 학자로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의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장했고 이런 전쟁 경험으로 인간의 악과 고통, 역사와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을 안고 살았다. 특히나 일본이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가한 식민 지배와 전쟁 행위를 명백한 침략과 가해 행위로 보고 전쟁을 미화하거나 축소하는 역사 인식에 비판적이었으며 일본 정부와 사회가 형식적 표현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반복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인으로 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사와 신앙에 대한 성찰은 자신의 개인적 삶에도 실천되었다. 언어학자인 그가 인도네시아 여성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고, 심지어 일본인들 읽으라고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교수 생활 은퇴 이후 그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 한국 등의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무료로 자신의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여행 경비도 자신이 부담하며 가해국인 일본의 국민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그가 위안부 할머니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순절이다. 부활을 준비하며 주일을 빼고 사십일을 세우는 기독교의 이 절기는 항상 수요일에 시작한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르는데 재로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일종의 재를 만드는 전통적 ‘레시피’가 있는데 매해 해당 연도 일 년 전 종려주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받으시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때 사용한 종려나무를 태운 재나 숯이다. 이마에 십자가 표를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성경에도 애도하거나 신 앞에 간구, 회개할 때 재를 뒤집어쓰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해서 재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를 상기시켜 준다. 이렇게 부활절 전 6주간의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아래서 자신을 영적으로 되돌아보는 영성이 그 시작에 있다. 


무라오카 자신이 직접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나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역사적 책임을 되돌아 보는 사순절의 영성을 오롯이 가졌던 그가 사순절 8일 전에 별세하였다. 공부할 때 질문이 생겨 이메일 주면 성의껏 답하겠다며 주었던 명함에 그의 이름이 내 책상 위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가 재를 뒤집어쓰던 모습으로 인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