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관순이 모태신앙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유관순의 부모는 가난하긴 했지만 일찌기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주변 친지들 역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 유중무는 유관순의 고향 충남의 매봉교회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1908년 매봉교회를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봉교회가 세워진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 였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1902년 생인 유관순은 모태 신앙으로 아버지의 뜨거운 신앙과 민족 의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유관순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공주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사애리시 선교사(史愛利施•Alice J. Hammond, 샤프 부인)의 추천 덕에 가능했다. 이화학당 재학시절에는 가까운 정동교회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정동교회 담임은 손정도 목사이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제2대 의정원 의장이었던 손목사는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분이었으며 정동교회를 다니던 유관순이 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성령의 역사와 민족을 지향하는 정신을 유관순도 전수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아버지 유중권은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간 유관순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 민족의 일꾼이 되라’고 늘 기도했다고 한다.
이화학당의 기록에 의하면 유관순은 당시 교내 기도실에서 많은 시간 동안 기도에 전력했다.
놀라운 사실은… 1919년 3월……아우내에 내려 온 유관순은 독립만세운동 직전 고향 매봉산에 올라가 3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할 때마다 함께 데리고 갔던 조카 유제한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흘 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으며,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서울에서 아우내로 내려와 실제로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교회와 목사, 그리고 교회 신도들의 목숨을 내건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매봉(지령리)교회에서는 유관순의 열정에 감동해 전 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유관순의 신앙과 믿음을 어려서부터 지켜봐 왔던 매봉교회 신도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지만……그녀의 설득에 모두가 감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관순은 거사 전날인 3월 31일 사흘 동안 기도했던 그 매봉산에 다시 올라 봉화를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 원근 24개의 산봉우리에서 봉화가 붉을 밝혔다. 그렇게 타오르던 봉화가 서서히 꺼질 때 즈음, 4월 1일의 해가 빛을 발하며 서서히 떠올랐다고 한다.
유관순은 거사 직전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유관순기념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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