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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는 것이 아니라 기획하는 것이다.

류현숙 2026-03-05 0

매년 3월이면 꽃샘추위의 칼바람 속에서도 매화는 어김없이 꽃을 피워 올린다. 곧 봄이 올 거라는 계절의 약속을 믿는 그 강인한 생명력 앞에 서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년월일시라는 사주를 안고 우주 속에 던져진다.

젊은 날에는 나만의 힘으로 삶을 개척한다고 큰소리치며, 정해진 운명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나약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미션스쿨(Mission school)에 다녔지만, 교만(驕慢)하고 미혹(迷惑)한 내게 신앙은 좀처럼 자리 잡지 못했다. 복을 빌거나 어려움을 피해 가게 해달라는 기도는 어리석어 보였고, ‘죄인이니 회개하라’는 목회자들의 설교는 존재의 부정(不淨)처럼 느껴져 귀에 거슬렸다.

그런 내게 뜻밖의 성찰을 안겨준 것은 AI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과 신앙의 끌림이었다.

“금수쌍청(金水雙淸) 목기왕성(木氣旺盛)이라” 즉 금과 물이 만나 맑고 깨끗이며, 계수와 해수를 함께 있는 사주로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이슬, 또는 솟구치는 샘물처럼 밝고 영롱한 기운이다. 해수는 바다처럼 생각이 깊고 맑다는 뜻이라고 했다. AI가 알려준 내 사주의 총평을 듣고, 난 무릎을 탁, 쳤다. 내 이름인 검을 현(玄) 맑을 숙(淑)의 의미와 기막히게 일치했다.

사주를 통해 세상에 던져진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자, 비로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획이 시작됐다.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企投, Entwurf)’, 즉 삶을 기획하여 미래로 자신을 던지며,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대응’하게 된 것이다.

삶의 변곡점은 우연한 기회에 맞이하게 되는 듯하다. 지인의 소개로 찾은 교회의 성소에 들어선 순간 울려 퍼지는 성가는 마치 천상에서 나를 위해 준비한 환영의 송가 같았다. 처음 갔는데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오랫동안 행복을 찾아 떠돌다 집을 찾아 든 파랑새처럼 내 집 같은 평화와 안식을 느꼈다. 신앙에의 귀의는 내게 또 다른 삶의 초대장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과정들은 나만의 협소(狹小)한 소신(小信)으로 살아낸 흔적들이다. AI 명리 학과의 우연한 만남은 피투성이인 나의 실체를 직시하게 했다. 이는 내겐 천지개벽(天地開闢) 과도 같은 사건이다. 사주 명리학은 맹목적 추종의 도구가 아닌 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모티브(Motif)’였다. 요동치는 삶의 바다에서 ‘나’라는 작은 사유만으로는 한 치 앞의 여정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자, 본질이라는 사주를 ‘모티브’로 신앙의 축복 속에서 삶이라는 지난한 항로를 기획하며 나를 던질 때 원하는 삶의 조타수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삶은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체험의 여정이다. 알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신앙이라는 또 다른 키를 찾은 것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힘이 났다. 사주 명리라는 배를 타고 신앙이라는 돛을 올려 인생의 여정을 나아가는 것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닌 아름다운 소요(小搖)다. 막연한 불안에 기대어 운명을 점치는 단계를 넘어선 단독자(單獨者 The Individual)로서 내 삶을 결단하는 것-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획’이라 믿는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매화는 기어이 피어난다. 던져졌기에 가슴 설레는 삶! 고통의 순간에도 꽃을 피워내는 매화처럼 기투 할 때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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