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착해서 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강해서 일까? 나는 좀처럼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일을 내가 다 감당한다. 육체적인 헌신, 정신적인 헌신, 재정적인 헌신도, 모두 말이다. 어느 순간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보니, 망가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래도 당장 쓰러질 정도는 아니라 안심한다마는, 계속 이렇게 가다 가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이러한 근심이 새벽에 몸을 일으킬 때마다 기분 나쁜 손님처럼 찾아온다. 어쩔 수 없이, 목회 사역의 짊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지기 시작했다. 내 상태를 설명했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비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한 원리가 있었다. 분배였다.
교회사역의 실천적 제 1원칙은 분배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조직이란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가장 처음 시행된 원칙이었다. 바로, 목사와 집사라는 제도를 만들고, 각 부르심을 따라, 사역을 분배한 것이다. 분배의 원칙은, 예수님의 원칙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분배 하셨다. 분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임까지 하셨다. 분배가 단순히 파이를 쪼개는 것이라면, 분배된 파이에 대한 책임까지 부여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위임 속에서 사도로 다듬어졌다.
교회에서 사역이 분배되지 않으면, 일은 한 곳으로 몰린다. 그러면 반드시 지치는 사람들이 생긴다. 사람이 지치면 불평이 일어나고, 불평은 다시 공동체의 분열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을 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실족으로 끝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다”라는 표현이 딱 맞다. 또한, 교회에서 사역의 분배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신의 양극화가 일어난다. 헌신하는 사람은 계속 헌신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안 하게 되는 것이다. 헌신의 양극화가 교회 안에 굳어지면, 교회는 역동성을 잃어 버린다. 작은 교회 일수록 그 부작용은 더욱 크게 공동체 안에 작용한다. 많지 않은 인원인데, 한쪽은 참여하고, 다른 한쪽은 점차 관망자가 되는 것이다. 헌신의 양극화는 언젠가 교회의 한 축을 무너뜨린다. 헌신을 주도하던 사람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건강한 분배 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사역에 참여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금방 나온다. 그러나 헌신의 양극화로 인해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교회의 한 축은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사역의 원리를 모르지는 않았다. 신학교에서 배웠고, 리더십 책들과 강의들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전 목회에 들어와보니, 내 몸과 마음의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에서 전혀 적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그마한 목회를 혼자 씨름하며 생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조금씩 감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감각을 배우지 않고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감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큰 조직을 이끌게 되는 것 같다. 나 같이 천성적으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생존하며 배워 나갈 뿐이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게 아닌가?’ 하며 지난 사역을 추회(追悔)한다. 나와 같이 늦은 감각을 가진 누구에게, 이 짧은 조언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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