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각 사람이 자기 고향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행전 2:5–6)
언어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게 하는 특별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단순한 다언어 구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에 관한 증언입니다.
“그들이 내 언어로 말하고 있다”라는 말은 의사소통이 성공했다는 말 이상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나의 세계, 나의 기억, 나의 정체성 속으로 들어왔다는 체험의 언어입니다.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한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규정하는 가장 깊은 층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언어로 말한다”고 느낄 때 안도합니다. 말하는 이가 나와 비슷한 관점과 삶의 궤적을 지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사건은 이 상식을 근본에서 흔듭니다. 갈릴리 사람들—배우지 못한 이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어떻게 각 민족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놀라움은 곧 신학적 질문으로 전환됩니다. 즉 “하나님은 어떻게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의 말씀 앞에 세우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인간의 언어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바벨에서 흩어진 언어를 무효로 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각 언어를 그대로 존중하신 채, 그 언어들 속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획일화가 아니라 번역이며, 지배가 아니라 내주(內住)임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인간을 어떤 초 언어적 상태—하늘의 방언—로 끌어올리기보다, 각자의 언어와 삶의 자리 한가운데로 내려오십니다.
군중의 반응—놀람과 당혹, 그리고 조롱—은 자연스럽습니다. 이전까지 하나의 성전 언어, 하나의 종교 언어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성적(polyphonic)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언어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지만, 여전히 타인의 언어로 깊이 사고하고 느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앙의 언어는 종종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극적인 강림은 청중만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이들 또한 놀랍니다. 은사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며,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를 그 사건 속으로 초대하는 참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곧 그분의 구원 역사—을 향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증인과 청중 모두를 변화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오순절은 교회의 탄생 이야기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침묵시키지 않으시고, 각자의 언어로 말하게 하시며, 그 언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교회는 이 성령의 방식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이해하게 하시는 분 또한 성령이십니다.
기도: 거룩한 은사를 주시는 주님, 당신께서 은사를 아낌없이 부어주실 때 우리가 조급해하지 않고 당신의 목적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소서. 각자의 언어 속에서 당신의 큰 일을 듣게 하시는 성령의 신비 앞에 겸손히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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