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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영호의 여행 영화 음악 이야기 ‘그로스글로크너’에서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와 황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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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글로크너’에서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와 황후를 만나다

손영호 2026-03-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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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하일리겐블루트에서 잘츠부르크로 이동하려면 그 중간에 넘어야 할 험준한 산길, 이른바 '그로스글로크너 하이 알프스 도로(Grossglockner High Alps Road)'를 지나야 한다. 이 도로는 총길이 48km, 머리핀 회전 구간 36곳 등 세계적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유명하다. 거의 1킬로미터에 한 번씩 360도 회전해야 하는 산길도로로 1935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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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1킬로마다 머리핀 커브를 해야 하는 ‘그로스글로크너 하이 알프스 로드’

   

하룻밤을 묵은 하일리겐블루트(Heiligenblut)는 직역하면 '성혈(聖血, holy blood)'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914년에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의 명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성혈을 로마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덴마크 기사인 프레데릭 브리시우스가 알프스 산을 넘다가 눈사태로 죽게 되자 자기 장단지의 찢어진 상처 속에 성혈 병을 감추었다. 그후 그의 시체가 지방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눈 속에서 3개의 밀 싹이 돋아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하일리겐블루트 마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는 얘기다. 

 또 문장에 등장하는 성 빈센트 교회는 1460~1491년에 13세기 이후 폐허가 된 옛터 위에 지어졌단다. 교회 주변은 온통 묘지인데 얼핏 브리시우스의 무덤이려니 생각하고 촬영했지만 나중에 확인하니 없어져 아쉽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실수를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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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일리겐블루트 성 빈센트 교회는 온통 묘지로 둘러싸여 있다. 가운데에 눈덮힌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이 보인다.

   

아슬아슬 곡예를 하며 드디어 그로스글로크너 정상(3,798m)이 보이는 해발 약 2,400m의 '파노라마 레스토랑'에 다달았다. 식당에서 좀 떨어진 전망 좋은 곳에 흥미로운 동상이 있는데, 1856년 9월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방문을 기념하여 1992년에 세운 것이란다. 그리고 식당 안에는 당시 황제와 황후가 앉았던 자리에 실물 크기의 인형을 갖다 놓고 아예 일반인들은 앉지 못하게 해놓았다.

그런데 나중에 할슈타트(Hallstatt)를 들렀을 때 거기에도 황제와 황후의 방문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황제와 황후, 할슈타트 첫 방문 후 25년 만인 1879년 4월24일 재방문하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면 1854년 4월24일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차 할슈타트를 방문했고, 그로부터 2년 후쯤에 그로스글로크너를 다녀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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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6년 9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세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그로스글로크너 방문기념비. 1992년에 세웠다.

   

이렇다면 숱한 곳에 이런 기념비가 있을 법 한데 그 이유가 나같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노라니 이미 들렀던 스위스의 제네바와 몽트뢰를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연은 끔찍하고 슬프다.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1830~1916) 오스트리아 황제는 1854년에 이종사촌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elsbach, 1837~1898)와 결혼하였다. 별명이 '시시(Sisi)'였다. 오스트리아 황후이자 헝가리 여왕이었던 엘리자베트는 1898년 9월10일 토요일 오후 1시35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을 타기 위해 한 명의 시종과 함께 제네바 호수 산책길을 걸어가다가 25세의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쇠꼬챙이에 찔려 암살 당했다.

당시 60세의 엘리자베트 황후가 제네바의 보 리바쥬 호텔에 공작부인이라는 가명으로 투숙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낸 암살자는 평소 한두 명의 시종만 거느리고 나들이를 하는 황후를 노리고 공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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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노라마 식당’ 안에는 당시 황제와 황후가 앉았던 자리에 실물 크기의 인형을 갖다 놓고 아예 일반인들은 앉지 못하게 해놓았다.

   

황후는 결국 그날 오후 2시10분에 44년 간의 황후의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원인은 가늘고 날카로운 10cm의 쇠꼬챙이가 8.5cm나 깊이 박혔고, 너무 꽉 조인 코르셋 때문에 출혈이 심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승선은 했으나 코르셋을 풀자마자 심각한 출혈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당시 그 배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 시녀가 급히 선장에게 황후의 신분을 알려 회항했고, 죽어가는 황후는 뒤늦게서야 호텔로 옮겨졌다. 급히 의사를 불러왔지만, 단 한 번 정신을 차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란 한 마디만 남기고 사망했다.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시신은 9월14일 수요일에 기차로 비엔나로 운구되어 9월17일 황실 봉안당이 있는 카푸친 교회(Kapuzinerkirche)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스위스 제네바 호수 옆에 암살 지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한편 루이지 루케니는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제네바의 에베셰 감옥에서 복역중 1910년 10월19일 벨트로 목매어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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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제네바 호수 옆에 세워져 있는 1898년 9월10일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 암살 지점 표지판

   

엘리자베트 황후가 여행을 많이 다닌 배경에는 결혼 2년차인 1855년부터 시시의 이모이자 악독한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의 자녀 양육권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어 이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남3녀의 자녀를 낳은 시시는 1889년에 유일한 왕위계승자인 30살 된 아들 루돌프 황태자(1858~1889)가 돌연 자살하자 실의와 우울증에 빠져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이전보다 더욱 도피성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참고로 루돌프 황태자와 당시 17세의 연인 마리 폰 베체라 남작부인이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에서 1월30일 권총으로 동반 자살한 사건은 1936년 아나톨 리트박 감독, 샤를 브와이에, 다니엘 다류 주연의 “허무한 사랑(Mayerling)” 등 많은 영화를 비롯하여 소설, 뮤지컬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인 1889년 5월28일에 처자가 있는 청년 귀족이며 스웨덴 군인인 식스텐 스팔레와 21살의 서커스 줄타기 처녀 엘비라 마디간의 권총 동반 자살 사건이 있었다. 

1888년 아버지를, 다음 해 아들을 잃은 시시는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그 다음 해에는 막내동생을 떠나보냈다. 연속적 비극으로 황후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등지고 평생 여행으로 시름을 달랬던 것 같다. 그런 한편 황후의 시종들은 결혼하면 쫓겨나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다. 

에피소드 한 가지. ‘노이슈반슈타인 성(백조의 성)’으로 유명한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동성애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가 21세 때인 1867년 1월22일에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사촌간이며 5촌 종고모인 조피 샤를로테(1847~1897)와 약혼까지 했지만 계속 미루다 결국 10월에 파혼하는, 일생 딱 한 번의 해프닝이 있었다. 바로 엘리자베트 황후가 주선했는데 조피는 황후의 막내동생이었다. 당시 왕족의 근친혼은 당연사였다.

루트비히 2세는 1886년 6월10일,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고, 사흘 뒤인 6월13일 오후 6시 이후쯤 근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주치의와 함께 의문사 했다. 나이 불과 40세 때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트 황후는 그의 손에 자스민 꽃을 손수 쥐어주었다고 한다. 

한편 엘리자베트 황후를 무지 사랑하고 온갖 난관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잘 수행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가정적으로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1861년 멕시코를 침략하여 제2제국을 만든 후, 1864년 요제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로 보내 막시밀리안 1세 황제로 등극시켰으나 1867년 6월19일 멕시코 급진개혁파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총살 당했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바로 이 사건을 다룬 그림이다.

1889년 왕위계승자인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1898년 엘리자베트 황후의 암살 그리고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그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격변의 역사 속 중심에 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916년 86세로 사망하여 68년 간의 통치를 끝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자유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이라고 일기에 쓸 만큼 황실의 억압과 위선에 맞선 반항적인 영혼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로운 영혼의 엘리자베트 황후는 '마지막 황후'라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적 관광상품이 되어 지금도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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