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침묵
이지현(본인)은 2025년 무렵까지 주로 토론토 중앙일보 문화면에 소식을 전하던 기자였다. 무릇 기자의 일은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전달을 바탕으로 사물이나 사건의 진실과 본질을 조명하여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사회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등긁게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문화면이 하는 역할은 다양한 문화 현상을 취재하여 대중에게 정확한 정보와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해석의 힘을 대중에게 전달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동시대적 문화 현상 기록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은 문화 향유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토론토 중앙일보를 떠나 본인은 토론토 예술 디자인 대학교 OCAD Interdisciplinary Masters of Art, Design and Media (MFA) 석사 과정에 재학 중으로, 졸업 프로젝트 발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가족 내에서 잘 다뤄지지 않고 쉬쉬했던 대한민국의 영웅, 안중근 의사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특히 ‘여성’의 침묵된 목소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신문사에서의 펜대를 내려놓고, 카메라와 붓을 들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휘몰아친 역사적 파도를 몸소 겪어내어야만 했던 본인의 외할머니(안연생)를 통해 안중근 의사라는 거대한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삶 그리고 어떻게 여성인 본인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는지를 재조명하여 어떻게 연대하고 함께 회복하는지를 고민하는 프로젝트이다. 현재 IAMD 석사과정 학교 학생 과대표직과, OCAD Faculty of Art 학과장, Dereck Sullivan, 학과장 Stephen Foster, 그리고 Canada’s Governor General Award 수상자 Max Dean의 멘토십, OCAD 학사과정 학생들과 함께하는 Encounters with Artists의 Project Assistant직을 역임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우연히 주변 동료에게 초대받아 2018년경, 효창공원에서 매년 8월 15일 광복절에 진행하는 평화축제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에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함세웅 신부님을 중심으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이자 미완성된 이론서 ‘동양 평화론’의 다국어 번역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 역사적 기록 보존에 힘쓰시는 분들이었다. 안중근 기념사업단 가택의 전통 가옥에 방문하여 유난히 그곳을 지키던 백구가 본인을 유독 반기던 통에, 본인의 외할머니의 존함을 밝히니, 더욱 자세히 연구 과정을 공유해 주셨다. 그곳에서 기념 사업회 분들을 통해 주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이토 히로부미’의거와 사형 선거로 알려져 있던 안중근 의사의 업적 외에 다양한 면모를 접하게 되면서, 다른 독립운동가 분들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안치되어있는 것과 달리, 안중근 의사의 유해만 아직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기념사업단 분들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북한, 중국 일대를 갔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심장 속에 그의 혼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이러한 우연한 만남은 가까이 있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한국의 영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본관은 순흥 안씨이다. 그의 집안은 한국에서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인 1세대 집안으로,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북한이 모두 존경하고 인정하는 독보적인 독립운동가다. 일제강점기 당시 남북은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북측(사회주의 계열 등)은 무장 투쟁을 통한 성취를 지향했고, 남측(민족주의 계열 등)은 정치, 언론, 교육, 기업 경영을 포함한 외교적 노력을 중시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 모든 영역의 활동에 참여한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업적 및 활동]
안중근 의사의 할아버지는 해주 일대에 큰 미곡상을 운영하며 고위 관료직을 지냈고, 안중근 의사는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그는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 교육과 산업: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가문의 자산을 들여 민중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해 문화적 억압에 맞섰다. 또한 평양에서 광산 회사를 설립해 한국 산업을 진흥시키고자 하며, 경제적 억압에 맞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 무장 투쟁으로의 전환: 교육과 기업 활동을 통한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 언론 활동: 무장투장을 전개하며 러시아 기반의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 신문은 3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 인도주의적 결단과 시련: 그가 이끄는 군대는 초기에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포로들을 잡았다. 안중근 의사는 포로를 죽이는 것은 국제법에 어긋나며, 무장 투쟁의 본질적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동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로들을 석방했다. 하지만 석방된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부대의 기밀 정보를 폭로하면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인도주의적 결정으로 인해 그는 수많은 동료를 잃게 되었다.
• 하얼빈의거: 동료를 잃은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해조신문 이후 러시아에 설립된 한글 신문, 대동공보와 협력하며, 그는 자신의 마지막 거사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러일전쟁 이후 하얼빈을 러시아가 관할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러시아 당국에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운동을 국제적인 맥락으로 끌어올렸다. 마지막 거사 이후 그는 중국 하얼빈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자신이 세계적인 뉴스 메이커가 되면서 국제 언론은 이 상황을 집중 조명했다.
•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 필묵: 그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았다. ‘안응칠 역사’, 그의 자서전을 집필함은. 물론, 어떻게 한국 – 중국–일본이 동양 평화를 수립해야 하는지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논의하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책이 완성되기 전 처형되었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함께 국제 기구를 설립하여 동양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의는, UN 국제 기구가 나오기 전, 반세기나 앞선 논의로서, 그의 선구안적인 면모를 시사한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정신을 담은 필묵을 남겼는데 일본 관료들로부터 수많은 요청을 감당하기가 매우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가 남긴 필묵 중 일부는 한국에 돌아왔고 30여 점 이상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관리되고 있다
다음은 The Memoir of the Fourth Finger (네 번째 손가락의 추억)의 전시 일정 및 학내 구성원 대상의 연구 상영(Academic Showcase) 일정이다. 전시회는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으나, 다큐멘터리는 추후 영화제 출품을 위하여 학술적 목적으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상영된다.
The Memoir of the Fourth Finger (네 번째 손가락의 추억)_exhibition
(회화, 유리공예, 도자, 영상, 설치 등을 포함한 전시회) – 대중 개방
2026 4월 1일 – 4월 6일 (205 Richmond St. room 118)
The Memoir of the Fourth Finger (네 번째 손가락의 추억)_documentary
Academic Showcase – 제한된 범위 상영
① Centre for Emerging Artist & Designer (115 McCaul Street, 3rd Floor, Toronto)
4월 2일 6 pm – 7:30 pm (VIP, Press Preview)
➁ OCAD Main Building (100 McCaul Street, room 353)
4월 2일 8 pm – 10 pm
③ OCAD Graduate Building (205 Richmond St., room 115)
4월 4일 3 pm – 6 pm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