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사애리시)의 생애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그의 남편 로버트 샤프를 소개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로버트 샤프(Robert Arthur Sharp, 1872.3.18~1906.3.5) 목사는 캐나다 온타리로 캐스토빌(Castorville)에서 태어났다. 1887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 유니언 선교사 양성학교에 입학하였고, 오하이오 오벌린대학(1900-03)을 졸업하고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한다. 그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10월 말 황성기독쳥년회(YMCA) 초대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 감리회 공주 선교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아내 앨리스와 함께 공주로 오게 되었고.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 하리동 뒷산 언덕 일대를 구입하여 선교지부를 꾸미고 예배당(공주제일교회)을 세우며 샤프 목사는 남학생을 위한 명설학당(영명학교, 현 공주영명고등학교)을 개설하고, 샤프 부인은 여학생을 위한 명선학당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공주의 첫 근대 학교였다.
이듬해인 1905년 11월엔 하리동 언덕에 2층 붉은 벽돌집을 지어 이주하게 된다.
샤프 선교사는 순회전도도 자주 하였는데, 공주를 거점으로 강경, 논산, 천안, 조치원 등을 방문하던 1906년 2월 말 강경 논산 지방 순회전도 도중 진눈깨비를 피해서 들어간 집이 하필이면 상여가 보관된 곳이었고, 전날 장티프스로 죽은 시체를 운구했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 되어, 1906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한국에 온 지 3년, 공주에 정착한 지 1년 남짓밖에 안된 안타까운 순직이었다.
샤프 부인은 결혼 3년 만에 사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08년 다시 한국 공주로 돌아와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을 이어가게 된다.
주간학교는 내가 실망하지는 않고 있지만 내가 원했던 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큰 학교를 갖게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현재 평균 출석인은 12명 밖에 안 되지만 그들 중 몇 명은 내가 한국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똑똑한 여자아이들이다.
곧 정규 주간학교 교사가 배치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공주 지역에는 35명이 넘는 학생이 있는 남자학교가 있다.
남편 사프가 타계하는 시간까지 그는 학교와 공주교회의 사역을 감당했으며 과중한 업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즐거이 모든 일을 감당하였다.
하루는 내가 공주를 떠나기 전에 남편 사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앨리스 샤프는 “나는 설교할 때 사프가 나의 오른쪽에서 나를 돕고 있는 것처럼 느킨다고 하며 그가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함께 있을 때 보다 더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적고 있다.
남편과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그는 어렵게 지내는 가정의 소녀들의 교육을 후원했는데, 이들 중에 유관순(영명 여학교 재학 중 사애리시 여사가 이화학당으로 전학시킴), 박화숙(성악가, 공주지역 만세운동 주도, 이묘묵의 부인), 김현경(공주지역 만세운동 주도, 유관순의 시신 인수), 노마리아(한국 최초의 여자경찰서장), 전밀라(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임영신 등이 있다. 엘리스 샤프는 논산읍내에 1909년 영화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진광남학교는 1913년에 폐교되었다.
앨리스 샤프가 선교 중에 곳곳에서 여성인재를 발굴하는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도 “영명100년사”에는 다음과 같이 세세한 장면들을 기술하고 있다.
사애리시 여사가 관순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천안에 있는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심방하는 자리에 동행하면서 였다. 사애리시 여사는 관순의 두터운 신앙심과 교회 주일학교를 열심히 인도하는 것을 보고 관순을 사랑하게 되었고 관순도 사애리시 여사의 적극적이고도 헌신적인 사회봉사 활동에 감화를 받아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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