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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기일

한순자 2026-03-19 0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올해로 9년 차다. 처음 몇 년은 남편 기일 날, 생일, 추석, 크리스마스 때 몇 번은 가게 되었으나 차츰 그 횟수가 줄어든다. 그래도 다른 때는 건너뛰어도 남편 기일만큼은 가야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큰딸이 이곳에 살 때는 같이 다니니 뭔 때를 챙기기가 수월했다면, 이젠 큰딸이 캘거리로 이사를 간 후론 가급적이면 바쁜 작은 딸은 쉬게 두고 나나 남편 묘지를 다녀오리라 싶었다. 

남편 기일이라고 굳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평소에 먹던 음식 한두 가지 준비를 해야지 싶어 두부 전과 동태 전을 부치고 불고기와 콩나물을 좀 무쳤다. 내가 먹으면서 남편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어 아침을 먹자며 가까이 사는 친구를 불렀다. 그 친구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침 그 친구 남편의 묫자리도 남편과 같은 장소였다. 그래서 같이 아침을 먹고 그 친구와 같이 묘지를 방문하리라 집을 나섰다. 

남편 장례 날은 3월이니 주변에 눈도 쌓여 있고 제법 추웠다. 하지만 그동안 딸들과 남편 묘지를 찾을 때면 날씨가 좋아 아빠 묘지에 오는 날은 늘 날씨가 좋다며 딸들과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싸서 간 음식을 먹기도 했었다.

그런데 남편 기일엔 역시 눈발도 날리고 비바람이 불었다. 묘지를 가는 도중 작은딸이 전화를 했다. 지금 일하는 중이라며 아빠한테 인사나 전해 주고 주말에 같이 가자고 하기에, 알았다고 전화를 끊으며 아주 무심한 자식은 아니었네!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마음이었다.

며칠 전부터 남편 묘지를 찾으며 꽃을 살까, 화분으로 할까 생각도 해봤건만 막상 날씨가 너무 추워 커피만 두 잔을 사서 묘지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같이 갔던 친구는 남편을 보낸 지 올해로 7년 차라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남편 장례만 치르고 묘지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고 했다. 사는 동안 애정이 없기도 했고 남편에 대한 나쁜 기억만 있어 남편 묘지를 찾을 생각도 않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노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남편 묘지를 찾으며 일삼아 그녀를 데리고 갔다. 

커피 두 잔을 사서 묘지로 향했다. 그녀는 처음 와 본다더니 남편 묘지를 바로 찾았다. 커피 한 잔을 건네주니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커피를 남편 묘지 주변에 부어 주며 하고 싶은 얘기를 하라고 일러 주었다. 각자 남편에게 인사를 하고는 우리는 묘지 앞에 위치한 코스트코로 갔다. 

남편이 사망하기 전까지 가게를 하면서 코스트코에 물건 하러 갔다가 올 때면 프렌치 후라이나 통닭을 사서 식을세라 서둘러 왔을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그래서도 난 남편 묘지를 찾을 때면 프렌치 후라이를 먹으러 그곳을 찾는다. 

집에 돌아와 큰딸이 보낸 문자를 보니 아빠 기일이라고 전은 사위가 부치고 간단하게 상차림을 했다고 한다. 내년에는 아빠 기일과 할머니 기일도 좀 더 신경 써서 잘 챙겨 보겠다며 상차림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거 차리지 않아도 되는데 사위한테 고맙다고 전하고, 너도 애썼다며 그것도 ‘삶을 즐기는 방식’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도 남아 선호사상이 강하기도, 아들은 대를 잇는다는, 나 죽은 다음 제사 지내줄 자식에 대해서도 운운하는 부모들이 있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내 안에 굳어진 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남편은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것은, 딸만 둘을 둔 남자여서 그랬을까, 딸을 둘 낳는 동안 한 번도 아들에 대해 거론한 적도 없으니 오히려 내가 불안해서 기필코 아들을 낳으리라 벼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남편 왈 “앞으로 시대가 바뀌는데 웬 아들 타령이냐”며 일축했던 남편이 참 고맙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내가 죽은 다음에 자손들이 하는 제사가 무슨 소용, 의미가 있을까. 그런 모두는 살아있는 동안 내 마음이 편하고자 하는 의식일 텐데, 오히려 예전보다 더 바쁜 시대를 살고 있어 식구들의 노동을 요구하고 있으니 각자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 같다.

딸들은 남편을 ‘순둥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만큼 남편이 딸들 눈에 순하고 여려 보이기도 자상한, 그런 아빠로 기억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을 때 얼마나 허망하고 황당했을까. 그러니 그런 아빠 기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게다가 큰딸이 할머니 기일 운운하는 건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지도 않겠지만, 큰딸 결혼할 때 할머니가 2천 불을 주셨다고 한다. 큰딸은 할머니의 그 마음이 두고두고 고마워 저도 그 고마운 마음을 할머니 기일을 빌어 생각하고 추억하고 싶어 그런 마음이 생겼을 것 같다.

관습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알아서 나름의 삶을 즐기는 방식을 아는 딸이 그래서 늘 고맙고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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