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히포크라테스의 오래된 이 문장은 인간의 유한함과 배움의 무한함을 대비시키며 우리 삶을 성취를 향한 끊임없는 경쟁처럼 느끼게 합니다. 짧은 인생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종종 ‘투쟁하듯’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흐르며, 서로의 다름이 갈등과 불편의 원인으로 여겨진 채, 문화의 차이는 벽이 되고 낯선 이웃은 부담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의도가 구현되는 창세기 1장 27절은, 인간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하 아담)을 창조하시되 그(오토, 단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니 남자(자인)와 여자(네케바)로 그들(오탐, 복수)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단수—‘그’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단수는 즉시 복수—‘그들’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인류)을 만드셨지만, 그 사람은 곧 서로 다른 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창조됩니다. 단수로 같게 창조되었으나, 서로 다른 복수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 이것이 인간(人間)입니다. 히브리어 ‘자인’과 ‘네케바’는 단순한 성별 구분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이 창조세계에 드러내는 사명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 무한한 다름을 우리 가운데 설계하셨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고,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서로 다름의 차이 나는 현실은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고, 그 서로 다름을 필요로 하게 하시며, 그 서로 다름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으십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삶은 나와 다른 너를 문제로 보고 싸워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이 다름과 차이를 통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으로 성취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동행을 통해서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동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을 함께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완성해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전쟁, 경제, 교육, 노동, 이민 등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이동을 우리는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는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적 디자인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섞이고, 때로는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고, 소속감이 약해질 수 있는 상황 가운데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이방 땅에서의 경제적 압박, 언어 장벽, 문화적 고립, 세대 간 단절, 정체성의 혼란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우리는 전쟁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창세기 1장 27절의 진리는 빛을 비춰 줍니다. 인간은 투쟁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동행을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다름을 통해 세상을 풍성하게 하셨고, 디아스포라를 통해 그 다름이 서로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색이 섞여 새로운 색을 만들듯,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아름다운 복음의 기회를 만들어 갑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다름이 빚어가는 동행의 예술, 함께 살아가는 예술로서의 우리 삶은 디아스포라 선교 현장을 통해 세대를 넘고 민족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동행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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