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이하는 부활절의 의미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토론토 중앙일보
오피니언 중앙일보 칼럼 다시 맞이하는 부활절의 의미
중앙일보 칼럼

다시 맞이하는 부활절의 의미

윤방현 2026-04-06 0

전쟁과 혼돈의 시대에 화해와 포용을


아흔의 문턱에 서서히 스며드는 봄기운을 느끼며 다시 부활의 계절을 맞이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 의미를 되새길수록 마음 한켠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전쟁과 광기로 얼룩진 지구촌의 현실이 부활의 기쁨보다 착잡한 마음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부활은 죽음 위에 선 생명의 선언이며 절망을 뚫고 나온 하나님의 사랑이고 용서와 화해의 완성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쟁의 포성이 지구촌을 뒤덮는 가운데, 불안과 공포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다. 트럼프와 네타야후가 일으킨 무모하고 명분 없는 이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전쟁은 뉴스의 자막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끝내는 처절한 현실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숨을 멈추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사라진다. 그런데 교회는 허울좋은 부활절 행사를 준비하고 목사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공허한 축복의 언어를 허공에 외친다. 이것이 신앙인가, 아니면 종교의 가면을 쓴 자기기만인가. 입만 살아있는 종교인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부활하신 이유는 죽음을 딛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신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 신은 누구를 위한 신인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포장하는 순간 신앙은 가장 위험한 도구가 된다.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악을 응징한다는 명분은 언제나 권력욕의 가장 편리한 가면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학살 속에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 말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폭격을 승인하고 전쟁을 확대한다. 신을 입에 올리는 자가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 신앙은 이미 죽은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침묵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으며 비인간적인 폭력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리고 애써 외면한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비겁을 선택한다. 한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의 지도자들과 정의를 부르짖는 언론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왜 정의를 말하지 않는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침묵하는 신앙은 결국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침묵은 악을 방조하는 공범이기 때문에 더 사악하다. “악을 행하는 자보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자가 더 악하다”는 말은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신의 경고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며 대부분의 경우 강자의 편에 서는 선택이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 무엇이 무서워서 침묵하고 권력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의미를 외면하는 위선자의 자리에 설 것인가.

침묵이 계속되는 한 부활절은 공허한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악을 향한 용기 있는 저항의 목소리다. 참 신앙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침묵하는 교회, 침묵하는 종교지도자, 침묵하는 언론은 입을 열어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악이 세상을 삼킬 때 침묵을 선택한 자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 이 비참한 영혼들은 선도 악도 선택하지 않고 살았던 자들이다. 그들은 하늘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옥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단테 신곡]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