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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여자 : 나의 왕, 나의 대한민국

류현숙 2026-04-06 0

요즘 매일 땅이 갈라지는 소리로 잠을 설친다. 나무마다 살갗이 찢기는 소리에 귀가 아프다. 꽃 피는 4월의 눈부신 자태를 위해 치르는 산고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것들은 이미 생을 다한 것들뿐임을 우리는 안다.

최근 한국에서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화제다. 단종의 비극적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스러져 간 어린 왕, 그 곁을 끝까지 지킨 한 남자의 모습이 관객의 마음을 붙잡은 듯하다. 피를 나눈 혈연 간의 처절한 권력 투쟁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극적이다.

내게도 왕이 있다. 얼마 전부터 나도 왕과 사는 여자가 되었다. 죽어가는 왕을 끝까지 보필했던 그 촌부처럼, 나에게도 목숨을 바쳐 지키고 싶은 왕이 있다. 그래서 기꺼이 '왕의 숨은 여자'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대한제국 말에 태어난 부모님에게 생명을 받은 나는 박정희 정부 내에서 성장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아침마다 새마을 운동 노래를 들으며 학교에 갔다. 가난했지만 희망으로 가득 찼던 유년기였다.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 믿으며 '우골탑'의 절박함으로 온 국민이 매달렸던 시대, 다행히 나는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역사를 통해 시대를 어렴풋이 인식했을 뿐이다. 36년의 독립운동을 거쳐 강대국의 힘에 의존해 건국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아픔을 인정한다. 주권재민이라 말하지만 사실 내 권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저 하루하루 하찮은 일상을 사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 하찮은 개인의 일상에도 역사의 흐름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던 날 아침은 생생하다. 그날은 언니의 결혼식 날이었다. 국가적 비극의 날 치러진 결혼식은 그래서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80년 서울의 봄은 회색빛 안개였고, 5.18의 뜨거운 이슈로 세상은 가마솥처럼 들끓었다. 새내기였던 나는 학교가 폐쇄된 채 집안에서 조카의 우유병을 들고 꿈을 접어야 했다.

1987년 6월의 거리는 한 편의 단막극 같았다. 서울역 앞을 지나다 수많은 인파가 외치는 '독재 타도'의 함성 속에 최루탄 가스가 상공을 덮었다. 국가공무원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나 같은 어리바리한 개인도 동조할 만큼 시대의 사명은 절대적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 방관자로 돌아갔다.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 생활에 숨 가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2017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보며 권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강력한 '카오스'임을 깨달았다. 내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아닐 수 있다는 성찰은 더 이상 방관자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내면의 소리로 나를 뒤흔들었다.

다시 역사를 공부하며 광화문으로 향했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의 간절한 기원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과 탄핵의 위협이 반복되는 지금, 역사의 비극은 여전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누군가는 잔인한 4월이라 했다. 생살을 찢고 어두운 땅을 밀어내며 살아야 한다고 외치기 때문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에 신화를 쓴 대한민국의 발전사 뒤로, 국가 부채와 사법 파괴 등 엄청난 파고가 밀려오고 있다. 4월이 아픈 이유는 국가의 불투명한 미래에 잠 못 이루는 깨어있는 자의 고통이다.

나의 나라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나의 왕이다. 죽어도 버릴 수 없는 나의 조국이다. 나는 왕과 함께 사는 여자로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K-Culture가 전 세계를 휩쓰는 이 저력으로, 이제는 더 이상 '왕의 숨은 여자'로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4월의 산고 끝에 눈부신 꽃이 피어나듯, 나의 왕 대한민국도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시 찬란하게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제 곧 벚꽃의 함성에 놀란 오월의 장미가 온 세상에 축복의 메시지를 쓰게 될 것이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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