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스브루크 구시가지에 있는 황금지붕.
인스브루크(Innsbruck)는 인구 13만여 명의 작은 도시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잘츠부르크 다음의 일곱 번째 큰 도시로 독일어 지명은 '인(Inn) 강의 다리(bruck)'라는 뜻이다. 이 작은 도시에서 동계 올림픽을 1964년, 1976년 두 번이나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다.
인스브루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구시가지 헤르초크 프리드리히 거리에 있는 ‘황금지붕(Goldenes Dachl, Golden Roof)’이다.
원래 이 건물은 티롤(Tyrol) 군주의 거주지로 15세기 초 프리드리히 4세 대공에 의해 광장의 행사를 관람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 황제(1459~1519)가 1494년 밀라노 공작의 딸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Bianca Maria Sforza, 1472~1510)와의 세 번째 결혼을 기념해 이 발코니 지붕에 불도금한 2,657개의 동판 타일을 덮으며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황금지붕'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 황제는, 1477년 결혼했으나 1482년 낙마사고로 죽은 첫 번째 부인 부르고뉴 마리(Marie de Bourgogne)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황금지붕에 조각된 테라스 장식에는 비앙카뿐 아니라 마리도 함께 조각돼 있다. 결혼생활 내내 비앙카는 마리와 비교되었고, 결국 황금 지붕이 완공된 1500년에 둘은 별거에 들어갔다. 비앙카는 10년 뒤인 1510년 인스브루크에서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고 장례는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필자는 한 가여운 여인이 그 먼 이탈리아 반도 밀라노에서 오스트리아까지 어떻게 시집을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황제가 잊지 못한 부르고뉴 마리는 도대체 어떤 여인인지 그 내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비앙카는 1472년 4월 5일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1444~1476)와 사보이아의 보나 사이의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세 살 위인 오빠 잔 갈레아초는 25세에, 두 살 위인 언니 에르메스는 33세에, 네 살 아래인 동생 안나 마리아는 21살에 사망했으니 그래도 비앙카가 스포르차 가문에서 가장 장수한 셈이었다.
비앙카 마리아가 4살 떄, 아버지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암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1476년 성탄절 이튿날, 성 스테파노의 축일 기념 미사가 열리는 밀라노의 산토 스테파노 성당(Basilica di Santo Stefano Maggiore)에서 세 명의 살인자의 칼에 무참히 찔려 살해당한 것이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호색가이며 잔인하고 포악했지만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르네상스 후원자였으며 “욕망과 재능을 겸비한 힘센 괴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초상화. 1505/1510년. 베른하르트 슈트리겔 그림. <자료: 위키백과>
그의 죽음은 북이탈리아의 5대 강국인 나폴리, 베네치아, 교황령, 특히 밀라노와 피렌체 사이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밀라노 5대 공작 갈레아초 사후 그의 7살 된 아들 잔이 제6대 밀라노 공작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보나가 섭정을 했다. 1489년 갈레아초의 동생인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1452~1508)는 밀라노의 위신을 위해 조카 잔 갈레아초를 자신의 또다른 조카인 나폴리의 이사벨라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밀라노 공작인 남편에게 실권이 없다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여 루도비코와 갈등을 빚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실권을 잔 갈레아초 부부에게 넘길 것을 주장하며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루도비코는 자신의 공작위와 권력을 보장받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잔 갈레아초의 여동생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를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 막시밀리안 1세 초상화. 1508년. 요스 판
클레이베 그림. <자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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