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부르크의 ‘황금 지붕’과 퓌센의 ‘백조의 성’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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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부르크의 ‘황금 지붕’과 퓌센의 ‘백조의 성’ (2-3)

손영호 2026-04-10 0

그리고 평소 나폴리를 노리던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은 뒤 나폴리를 침공하라고 꼬드겼다. 샤를 8세가 군대를 움직여 1차 이탈리아 전쟁이 개시된 1494년에 맞춰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독살하고 형수를 쫓아낸 후 권력을 찬탈한 루도비코가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의 권력투쟁의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혼란은 1559년까지 무려 65년간 여덟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후에야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1500년 노바라 전투에서 오히려 프랑스군에 붙잡혀 1508527일 로슈 성(Chateau de Loches)의 지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이런 와중에 14784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일요일 미사를 드리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한 살해 사건이 있었는데, 이른바 파치 음모(Congiura dei Pazzi)’ 사건이다. 피렌체의 통치가문으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파치(Pazzi) 가문이 주도하여 일으킨 쿠테타를 말한다. 동생 줄리아노는 칼에 19차례 찔려 즉사했고, 형 로렌초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현장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다. 음모 사건 배후에는 교황 식스토 4(Sixtus IV)가 있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공모자와 주동자들의 대부분은 곧 체포되어 성난 군중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파치(Pazzi) 가문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가문 이름이 건물과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지워졌다. 참고로 루제로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 1857~1919)1893년 작곡한 4막 오페라 메디치(I Medici)”는 바로 파치 음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메디치 가문과 조국 피렌체의 최대위기를 잘 극복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적국인 나폴리에 뛰어들어가, 놀라운 기지와 능력으로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강화 조약을 맺는 값진 결과를 이룸으로써 풍전등화에 놓였던 피렌체를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또한 자신의 차남 조반니(훗날 교황 레오 10)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종교계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도 키워나갔다. 아울러 1478년 암살당했던 친동생 줄리아노의 원수도 갚는 데 성공한다. 이를 위해 10년간 끈질긴 노력을 통해 사건 주모자 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식스토 4세 교황의 조카인 지 롤라모 리아리오 백작을 1488년에 암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15세기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올망졸망 분산돼 있던 봉건영주국 사이에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혼과 인맥을 통해 동맹을 맺거나 상호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정치적 합종연횡(合縱連橫)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아 르네상스를 꽃 피운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다시 우리의 주인공 얘기로 돌아온다. 1474년에 사촌인 9살의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1세와 결혼했던 비앙카는 그가 17세로 요절하면서 10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 이후 혼담이 오갔지만 다 무산되었다.

드디어 1494 316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다. 비앙카 마리아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인문주의자였던 막시밀리안 1세는 그녀를 전처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비교하면서 똑똑하지 않은 평범한 아이같고 말이 많으며 사치스럽기만 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비앙카 마리아는 몇 차례 임신했으나 모두 유산했다. 아마도 신경쇠약으로 인한 식욕부진과 우울증 등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1499프랑스가 밀라노를 정복하면서 비앙카 마리아는 정치적 가치마저 상실했다. 이후 부부는 별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150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포한 순간에도 비앙카 마리아는 그의 곁에 있지 못했다. 궁중 역사학자이며 내과의사였던 요제프 그륀페크(Joseph Grunpeck, 1473~1532)비앙카의 죽음은 무관심으로 무시했던 황제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비앙카 황후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결혼 전인 1493년에 결혼 기념 여행으로 방문했던 퓌센(Fusse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는 1498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별거 선고를 받고 눈물을 흘렸던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천당과 지옥을 오간 곳이 퓌센이었다고 하겠다. 퓌센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막시밀리안 1세가 그토록 잊지 못했던 브루고뉴의 마리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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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의 마리 초상화, 1530-40. 샤토 드 가스베이크 그림. <자료: 위키백과>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Duchess Marie de Bourgogne, 1457~1482) 용담공 샤를 1(Charles I, the Bold, 1433~1477) 그의 두 번째 부인 이자벨 드 부르봉(1434~1465)의 외동딸로서, 별명은 ‘부귀공 (the Rich)’이다.

147612월 엄동설한에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는 프랑스의 로렌 공작인 르네 2세의 군대로부터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를 탈환하기 위해 이곳을 포위했다. 그러나 다음해 15일에 치른 이른바 낭시 전투(Battle of Nancy)에서 프랑스군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들의 결사항전으로 샤를 1세가 전사하자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를 프랑스 왕실에 귀속시키려 했다.

그러자 상속녀 마리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상속지를 지키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대공과 1477 818일에 정략 결혼하였다. 1479쥐느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대공이 승리하면서 저지대 지역과 프랑슈콩테 일대는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피카르디와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은 프랑스에 넘어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부르고뉴 공작이 다스리던 영지는 현재 프랑스 일부와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로 알려진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모두가 탐내던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이 결혼으로 합스부르크가가 이후 떵떵거리며 살게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의 결혼으로 인해 합스부르크가는 에스파냐와 신대륙,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을 손에 넣게 됨으로서 유럽 최대의 가문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복덩이가 들어왔으니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예쁘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1482년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마리는 왜가리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아이는 사산되고 그녀도 사망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25살의 나이였다. 마리는 막시밀리안 대공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남공 필립(Philip the Handsome, 1478~1506)과 딸 마르가레테(Margarete, 1480~1530)를 낳았다.

필립은 부르고뉴가문의 필립 4세가 되고, 149610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에스파냐의 상속녀인 카스티야의 후아나(Juana de Castilla, 1479~1555)결혼하여 1506년 남편 필립이 아내의 권리를 대신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펠리페 1세 국왕이 됨으로서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스파냐와 에스파냐의 신대륙 영지까지 차지하였다. 또 필립의 24녀 자녀들 역시 정략결혼을 통해서 합스부르크가문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펠리페 1세가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우울증이 더욱 깊어져 미친 후아나’(Juana la Loca, Juana the Mad)라는 별칭을 얻게 된 불행한 여인 후아나는 모친이 죽자 카스티야 왕국의 후아나 1세 여왕이 되었으나 아버지에게 섭정을 맡기고, 1509년부터 토르데시야스 왕궁(Tordesillas)에서 홀몸으로 살다가 15554월 성금요일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부모인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라 여왕, 남편 펠리페 1, 조카인 미구엘 왕자 등이 잠든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Royal Chapel of Granada)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1482년 마리가 낙마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영토분쟁이 불거졌다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와 1482 1223일에 아라스 조약을 맺어 영토분쟁을 마무리 짓고, 자신의 2살된 딸 마르가레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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