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쓴 글을 지면에서 보지 못하고 영상신문으로만 읽어야 하는 시간이 벌써 여섯째 해에 접어듭니다. 토론토의 신문사들마다 지방 배달을 중지한 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어에 능숙한 아이들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쓰는지 알 도리가 없기도 하지만 전문 분야는 전적으로 각자의 몫으로 존중하는 터라 깊은 관심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영어 성경을 필사하기 시작하여 오늘 시편 1권을 마쳤습니다. 시편 저자의 다급하고, 황급하고, 갈급한 부르짖음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간곡한 소망이라 한 절 쓰고 묵상하기를 계속하게 합니다.
이번에 컴퓨터를 손보면서 ‘번역’이란 항목이 끼어 있기에 시험 삼아 넣어보았습니다. 제목도 마침 “꽃 십자가”였고 손녀가 함께 간 예배였기에 이해가 쉽게 되리라 생각하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장 두 시간 정도 다시 쓰고 교정하여 영역 작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보내고 읽을 만한지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영어 작문 시험을 치른 학생처럼 아이들의 평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편 우습기도 하고 명색이 서양교회 장로라면서 아이들에게 성경말씀을 쉽게 풀이해서 들려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뭉게 뭉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건 아이들에 대한 죄스러움만이 아니라 나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처럼 느껴졌습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쓰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변명하느라 바빴습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 토론토에서 딸이 내려왔습니다.
한국식품점에 들려 중앙일보 금요일 판을 찾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귀퉁이가 젖어 있었습니다. 그 신문이 마지막 남은 것으로 맨 밑바닥에 깔려 있어 약간 젖어 있었답니다. 한국신문이 하루 사이에 다 나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젖은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종교란에 실린 귀한 하나님의 말씀들 때문에 신문이 다 나가기라도 한 듯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저 자신도 놀라게 하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에 얼마나, 어떤 소통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하나님 앞에 힘들다, 바쁘다는 변명이 성립될 수 있을지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 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편 37: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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