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푹 쉰 난후 여독이 풀리자 큰누이를 따라 얼마 전에 요절한 둘째 누나 묘를 찾았다. 늦게나마 누이의 명복을 빌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유년기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누나는 나하고는 한 살 차이였다. 방학 때 우리 집을 오면 조무래기 친구들이 서울 학생이 왔다고 친 하려고 누이에게 접근을 해보려고, 하지만, 서울서 왔다는 티를 내려고 냉정하게 근접도 못하게 하였다. 그야말로 어린동심들에겐 설래. 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누이가 여기에 누워있을 줄은 나 자신도 상상도 못했다. 명랑한 성격에다 인정이 많아 툭하면 눈물을 터졌던 누이였다. 현지답사 왔을 때 씨엔 타워 에 올라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때린다.
"충모야? 너, 거기서도 살만한데,
"여기는 무엇 하러 오려는 거니?"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릴 수가 없겠니?
"여기 와서 살다 보면 열의 일곱 명은 후회들을 하고 돌아가는데……."
그 말속에는 오지 말라는 강한 호소력과. 애절함이 동시에 배어났다. 그러나 나는 누이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누이의 소리는 한낮 공 연불에 불과했던 것이다.
얼마나 캐나다 생활이 지긋지긋 했으면 현지답사를 온 동생한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누이 말을 수긍하다가도, 머리를 강하게 좌우로 돌리며 부정을 했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할 나름이 라고!" 난 누이가 이승에서 마지막 해 준말을 곱씹으면서 명복을 빌었다.
무덤은 봉분도 없이 성량 곽 같은 비석만 오뚝이 서있었고, 바닥은 잔 뒤가 깔려 있으나 질퍽질퍽하여, 꽃다발만 가지런하게 놓고 묵념을 하는 것으로 절을 대신 했다. 조상을 잘 섬겨야, 삼정승 육 판사가 나온다는 유교적 낡은 폐단 때문에 산 전체를 민둥산을 만들어버린 우리나라 묘지 문화를 보며, 캐나다인 들은 조상에 대해 너무 인색한 것 같았다.
여기에 누어있는 이 누이의 신랑은 서울 중앙우체국에 근무를 하였고, 영어 실력 이 특출한 엘리트였다. 해외지사 생활을 시작으로 월남에 가서 3-4년 근무하다, 캐나다로 이민을 신청을 하여 온 것이다.
초창기 때는 투자이민이나 순수투자. 이민제도는 없어서, 고작 친척 초청이나. 기술이민을 우선시 했다. 그런가 하면 제 삼국을 거친 이민자들도 많았다. 일차적으로 부라질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이 왔고, 이어서 서독광부가, 왔고, 후속으로는 월남출신들이 대거 캐나다로 몰려와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안다. 이분. 나의 이종매부도 이 무리의 속한 것이다.
특히 부라질 농업 이민 정책은 우리정부의 실수였다. 사전에 현지사정은 전여 고려하지 않고, 서둘러 보내기에만 급급해,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는 농부를 보내 않고, 중산층 지식인들을 보낸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 일로 부라질 정부와 우리정부 사이에 외교적 마찰을 빗기도 했다. 막연히 외국을 동경해, 농기구 한번 잡아보지도 못한 "인태리" 들을 보냈으니 부라질 정부에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이의 무덤을 뒤로하고 큰 누이를 따라 시내구경을 하였다. 한 세기가 넘은 건물들이라 거무칙칙하게 이끼가 끼어있었다. 노후 하지만 웅장하고 정교(精巧)한 모습은 예술적으로 고색 찬연 했다. 담벼락에 말라 배틀려진 담쟁이넝쿨은, 성당건물을 거미줄처럼 칭칭 감고, 그 위로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는 햇볕의 반사되어 성당의 성스러음을 한 것 뽐내고 있다.
한쪽 모퉁이에 서있는 성모마리아는 나의 토론토 입성을 반기는 듯 단아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옆의 가로 질려있는 사이에는 무덤이 뜨문뜨문 있는데, 무덤을 집근처에다 쓴다는 것은 한국 정서로 보면 섬직한 마음 까지 들었다. "동-서양, 미신 문화의 대한 인식 차이는 이렇게 상반되어 있었다.
동양 미신 철학은, 특히 우리나라는 사람들은 사후 귀신이 되어,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귀신으로 미화시키는 반면. 서양인들의 미신 개념은. 사후 .유령으로 나타나, 인간들에게 많은 은혜를 준다고, 한다. 그래서 캐내디. 인들은 집을 사면 무덤근처를 선호한다고, 한다. 유령들이 큰 행운을 줄 거라는 관념 때문에 집값도 보통지역 보다 더 비싸다, 한다. 그만큼 캐나디언 들은 신의대해 두려움이 없고,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이들의 미신 철학이 안인가 싶다.
전차를 탔다. 나에게는 추억의 전차다. 난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도 특이한 광경이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였다. 동대문에서 서대문으로 전차를 타고 가던 때 일이었다. 아주머니 한분이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등에는 애기 업고 전차에 올랐다. 아주머니는 전차표를 내야 하는데, 온몸에 물건이 꾸려있어 할 수 없이 전차표를 입에 물고 엉거주춤, 운전사 쪽으로 닦아가 표를 턱으로 내밀었다.
순간 운전사 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표를 손으로 달래는 것이다. 놀란 아주머니는 얼떨결에 입에 물었던 표를 손으로 잡는 순간 머리에 이었던 보따리를 떨어 드렸다. 떨어진 물건은 들기름 이였다. 농사를 진 것을 서대문에 사는 막내딸한테 주려고 가져가던 길이었다. 차안은 온통 들기름냄새가 진동했고, 승객들의 인상은 찍으려 들었다. 아주머니는 순간적 돌발사건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데, 기관사의 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보다 못한 승객들이 한마디씩 거들 며. 아주머니를 보호하고 나섰다.
"기관사, 양반? 당신은 아이도 없소?
"애기를 등에 없고!"짐은 머리에 이고, “어쩔 수 없지 않소?
“위로는 못할망정, "이렇게 야단을 떨어야 되겠소?
승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항의를 하는 바람에 기관사의 노기는 숙정이 되었지만, 생각이 짧은 기관사였다.
전차 안은 괴상한 사람들로 꽉 차있다. 영화에서 나 봄 직한 식인종 같은 무리들이 무어라고 지껄여댄다. 검둥이. 흰둥이들이 벌건 입술에 허연 이를 들러내고 히히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밀림 속의 고릴라들 같았다.
뻐더 냄새. 카래 냄새. 별 아별 냄새가 사정없이 콧속을 후벼 파고 들어온다. 그 냄새를 맡고 있자니, 우리의 김치냄새가 동시 떠오른다. "이들도 우리의 김치냄새를 맡으면 이와 같이 역겨울 것이 안인가? 애써 그들을 이해를 해보려 해도 처음 보는 광경에 쉽게 적응이 안 되었다. 기어이 참고 참았던 재치기가 터졌다. 연신 채취기를 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시선들이 온통 나에게로 쏠려있다. "난 사람 처음 보았나 하며, 짜증이 났지만, 이곳 물정을 몰랐다는 것이 오래가지 않아 들어 났다.
이 나라에서는 재취기도 방귀소리 못지않게 역겹게 생각 한다고, 누이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 소리를 들은 난 주위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런걸. 기세 좋게 여러 번을 연발했으니, 그들 눈엔 내가 어느 미개한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난서양사람 들은 상대방의 발을 밝으면 밝힌 쪽에서 미안해 한다는 소리를 외국여행한 사람들로부터 간혹 그 들어왔다. 그래서 외국에는 신사들만 사는 걸로 생각을 해왔는데, 직접 누이에게 들어 보니, 그것은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과시에서 온 소리란 걸 쉽게 짐작이 같다.
물론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 천이 안 들어갈 때 예기고, 돈이 드는 일이라면 전여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동차 사고가 났다 고하자! 자기들이 뒤에서 밭아놓고도,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 이민자들의 습성이다. 물질로 배상하는 일에는 한 치도 양보가 없는 것이, 복합사회의 이기주의적 근성이다. 누이의 소리에 난 새삼 별천지의 온 느낌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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