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엔슈방가우(Hohenschwangau) 성
한편 1482년 마리가 낙마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영토분쟁이 불거졌다.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와 1482년 12월23일에 아라스 조약을 맺어 영토분쟁을 마무리 짓고, 자신의 2살된 딸 마르가레테와 루이 11세의 장남 도팽 샤를(훗날 샤를 8세)과 약혼한 후 다음해 1483년 3살 때 프랑스 궁궐로 보내졌다. 그러나 마르가레테는 1491년에 샤를 8세가 브르타뉴의 여공작 안(Anne de Bretagne, 1477~1514;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전에 혼인이 무효화되었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1세의 비앙카 마리아와의 혼인은 사실 두 번째 결혼인 셈이다)과 결혼하는 바람에 파혼하고 귀국하였다. 이로 인해 샤를 8세는 1493년에 막시밀리안 1세와 상리스 조약을 맺고 마르가레테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일부 부르고뉴 영지를 되돌려주었다.
마르가레테는 1497년에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 여왕의 19세인 장남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왕세자와 혼인하였으나 6개월만에 사망했고, 1501년에 21살인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재혼했으나 3년 뒤인 1504년에 사망했다. 남편 복이 지지리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된 근친혼에 의한 유전적 요인 등과 왕위를 이을 왕세자 생산을 위한 과도한 성생활 등으로 당시에 그런 예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우리는 매수와 정략 결혼으로 이어진 혼맥(婚脈)과 인맥(人脈)을 통해 동맹을 맺거나 상호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르네상스를 꽃 피운 15세기의 유럽 역사의 편린(片鱗)을 살펴보았다.
이제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퓌센(Fussen)으로 가본다. 퓌센은 매년 13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즉 '신(新•neu) 백조(白鳥•schwan) 석성(石城•stein)'이 있는 곳이다. ‘백조의 성’은 바이에른의 제2대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가 1869~1892년 사이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루트비히 2세가 이 성에서 머무른 기간은 3개월 정도 밖에 안되었고 끝내 이 성의 완성을 못 보고 사망했다. 루트비히 2세가 생전에 완공한 궁전은 1870년에 건설을 시작해 1886년 완공된 린더호프 성(Schloss Linderhof)이 유일하다.
여기서 'neu'가 붙은 이유는 아마 12세기에 지어진 호엔슈방가우(Hohenschwangau) 성의 옛이름이 'Schwanstein'이었고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차별화 하기 위해 'neu'가 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니까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황후가 방문했던 시기엔 퓌센의 호엔슈방가우 성에 머물렀지 싶다.
1864년 3월10일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는 15세 때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로엔그린(Lohengrin)'을 보고 오페라에 나오는 백조의 성을 짓겠다고 결심하고,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 등을 참작하여 지은 성이 '신 백조의 성'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르트부르크 성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신약성서를 고지(高地) 독일어로 번역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22년 9월의 일이다.
비록 루트비히 2세는 광인왕(狂人王)으로 불리었지만 바그너 입장에서는 구세주였다. 바그너의 걸작으로 꼽히는 '니벨룽의 반지'는 스위스 망명 중이었던 1848년부터 1874년까지 26년에 걸쳐 혼자서 대본을 쓰고 작곡한 대작이다. 무려 18시간, 나흘짜리 공연이다 보니 마땅한 공연장소가 없어 1874년 1월, 루트비히 2세가 10만 탈러(Thaler)를 들여 바이에른 북부 도시인 바이로이트(Bayreuth)에 새 극장을 짓게 된다.
그리고 이왕 짓는 김에 바그너 식구가 편히 거주할 반프리트 빌라(Villa Wahnfried,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는 뜻)도 같이 짓고 드디어 1876년 8월에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다.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공연되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1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음악페스티벌이다.
▲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루트비히 2세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사촌이자 그의 5촌 종고모(從姑母)였던 조피 샤를로테 공녀(Duchess Sophie Charlotte, 1847~1897)와 1867년 1월 약혼했지만, 동성애자였던 그는 10월에 파혼하는 일생에 딱 한 번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 약혼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부인이자 조피의 친언니인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telsbach)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루트비히 2세는 1886년 6월10일,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고, 사흘 뒤인 6월13일 오후 6시 이후쯤 근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주치의 구덴과 함께 의문사 했다. 나이 불과 40세 때였다. 당시 군국주의를 추구했던 바이에른 귀족, 정치인, 근대적 언론인들에겐 말도 안되는 동화 속 몽상가로 비쳤으니 정신병자로 몰아부쳤을 것이고, 장신이며 수영을 잘한 그가 얕은 물에서 익사했다는 점에서 암살 의혹이 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그의 장례식 때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루트비히 2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랄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으며 특히 승마와 수영에 뛰어났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컸던데다가 즉위 후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 속에서,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정치를 외면하고 더욱 예술과 건축에 빠져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인이자 국가의 군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압박은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의 그에게 심적 스트레스와 더불어 도피적인 생활을 하게끔 만들었지 싶다. 당시 그에겐 안정적인 정치적 후원자가 없었으며 그의 사촌들과 비텔스바흐 가문 식구들은 유럽 각계로 흩어졌기 때문에 가까이서 그가 마음을 맡기거나 도움을 받을 인물이 없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루트비히 2세가 ‘백조의 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건설할 때, 처음에는 왕국의 예산이 아닌 왕실의 사비로 자금을 충당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수많은 외국 왕실과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 국고에까지 손을 대려 호시탐탐 시도했으니 ‘건축왕’은 ‘광인왕’으로 불릴 만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세기 반이 지난 지금, 루트비히 2세의 건축이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당시에 진 빚을 몇 번이나 갚고도 남을 수준의 높은 관광수익을 벌어들이는 후손들에겐 아예 성군으로 여져지고 있다. 또한 후대의 바그네리안들(Wagnerians)과 독일 예술계에서도 루트비히 2세는 은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듯 루트비히 2세는 족적으로 보나 남겨놓은 역사적인 의미로 보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정치인으로서는 무능했고, 군주로서는 불안했지만 그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왕이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 유럽의 숱한 가문의 이야기는 이렇듯 정치, 권력, 문화, 예술과 얽히는 복잡한 과정을 보여주며, 역사 속에서 그들의 존재와 유산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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