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을 넘긴 몸으로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생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낮아지고, 느려지고, 또렷해진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한 장씩 넘기듯, 지나온 시간들이 조용히 되감긴다.
겨레의 불침번으로 청지기의 삶을 살려고 애썼지만 뒤돌아보면 못다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 그것이 재물이든 관계든 시간과 기회든 나는 그것을 잠시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늘 불침번처럼 살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누군가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내 삶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불침번의 시간들은 구체적인 장면들로 남아 있다. 세상이 술렁이던 어느 해, KAL기 폭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수천 명을 모아 항의의 목소리를 냈던 일도 있었다. 또 낯선 땅에서 신분의 경계에 서 있던 탈북자들과 불법체류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의 영주권 취득을 돕기 위해 캐나다 주류사회와 연결하고 문을 두드리며 뛰어다녔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외면하지 않고 물질로, 시간으로, 관계로 할 수 있는 만큼 도왔다. 이민의 삶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한국노인들을 위해 토론토 한국노인회 종합복지회관을 건립하기까지 모금위원장으로 신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쿠바 땅에 흩어져 살던 한인 후예들을 생각하며, 토론토의 노인들을 모아 실버 선교에 나섰던 일도 내게는 잊히지 않는 시간이다. 그 작은 움직임들이 훗날 한국과 쿠바가 국교를 수립하는데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작은 씨앗도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한편으로는 평통위원회 간사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조국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거창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깨어 있는 것,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면, 이웃을 돌보느라 정작 내 가족에게는 소홀함이 있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지금은 조용한 회한으로 다가온다. 이웃을 향한 헌신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충분히 머물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또렷하게 보일 뿐이다. 인생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일만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이와 함께 걸어주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늦게서야 배운다. 죽음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날짜를 기다리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낯익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돌아갈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두 본향으로 돌아갈 사람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제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은 결국 ‘동행’이었다. 함께 웃던 사람들, 힘들 때 등을 밀어주던 친구들, 말없이 곁을 지켜주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업적도 아니고 숫자로 환산되는 어떤 성취도 아니다. 결국 사람이다. 나와 같은 길을 잠시 걸어준 사람들, 그들의 온기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달렸다. 목표와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순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세월은 어느 날 갑자기 늙음을 가져오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용히, 등을 밀어 앞으로 보내버린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수술이 성공할지, 그 이후의 시간이 얼마나 허락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준비하는 삶 자체가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정리하고, 내려놓고, 보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곧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 삶의 흔적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남겨진 발자국이, 뒤따라오는 누군가에게 “괜찮다, 함께 가는 길이다”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이 시간, 빛은 점점 사라지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은 더 따뜻해 보인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드럽게 정리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본향으로 돌아갈 길 위에 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혼자 가지 말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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