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디서나 2000원 안팎이면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시대다. 커피가 일상의 ‘수분 보충’ 혹은 ‘카페인 수혈’의 수단이 된 지금, 동시에 정반대의 움직임도 나타난다. 단순히 맛있는 커피를 넘어, 한 잔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공간 자체에 의미를 두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지난 17일에 문을 연 서울 한남동 ‘언페이지(Unpage)’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대표 제조 음료는 한 잔에 약 1만5000원대다. 처음엔 누구나 잠깐 멈칫하게 되는 숫자다. 하지만 이곳이 보여주는 건 단순히 ‘비싼 커피’라기보다, 왜 그 가격이 붙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커피계 파인다이닝, 5중 필터 물 쓴다
긴 바(Bar) 앞에 선 사람들은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대신 앰버서더(바리스타)의 손끝을 응시한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기다리는 보통의 카페와는 결이 다르다. 도구와 재료, 추출의 전 과정이 시선 안에 놓인다. 마치 파인다이닝의 오픈 키친처럼, 원두를 갈고 물을 맞추고 추출을 조율하는 움직임이 바 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전부는 아니다. 한 잔을 완성하는 공정은 물에서부터 시작된다. 언페이지는 하나의 물을 고정해 쓰지 않는다. 카본, 미네랄 등 5가지 필터를 거친 물을 그날의 원두 상태에 맞춰 미세하게 배합한다. 얼음 역시 단순히 얼려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밀도를 높인 뒤 단단하게 만든 것을 사용한다. 우유 역시 락토프리 우유를 동결 농축해 쓴다. 별도의 시럽 없이 진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내기 위해서다.
왼쪽은 밀크 워싱 기법으로 완성한 시그니처 메뉴 ‘펀치’, 오른쪽은 우롱차를 침지한 우유에 레몬 제스트와 밀크폼을 더한 ‘스윗 티스’. 이지영 기자 [출처:중앙일보] 이쯤 되면 ‘왜 이렇게까지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유는 분명하다. 결국 더 나은 맛을 위한 선택들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까지 손을 대는 방식이다.
그래서 메뉴도 예상과는 조금 다르다. 언페이지는 일반적인 아메리카노 대신 필터 커피와 시그니처 음료에 집중했다. 유명세나 규모보다 맛을 중심으로 선별한 5개 로스터리의 원두를 바탕으로, 각 원두의 성격을 다르게 풀어낸 메뉴들이 놓인다.
그중 가장 낯선 건 시그니처 메뉴인 ‘펀치’다. 상하이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OPS와의 협업으로 선보인 메뉴로, 언뜻 아메리카노처럼 보이지만 밀크 워싱 기법을 적용해 맑은 외형과 부드러운 질감을 구현한 밀크커피다. ‘스윗 티스’는 우롱차를 침지한 우유에 레몬 제스트와 밀크폼을 더한 커피다. 익숙한 커피의 범주에서 살짝 벗어난 구성이다.
‘한국, 커피 잘하네’ 보여주고 싶다
이 공간을 기획한 구독자 26만 명의 커피 유튜버 ‘안스타’는 커피 업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원두 리뷰와 추출법, 카페 방문기 등 다양한 콘텐트를 꾸준히 선보이며 커피 애호가층의 인지도를 쌓아왔다. 현재는 스페셜티 원두 큐레이션 플랫폼 ‘언스페셜티’를 운영 중이다.
그는 오프라인 커피 공간에 오랫동안 회의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공간을 만든 건 효율이 아닌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국 커피 수준이 높은데도, 이를 대외적으로 보여줄 공간이 없다고 느꼈다”며 “단순히 커피를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 무엇이 좋은 커피인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력 있는 로스터리와 수준 높은 커피는 많지만, 이를 한 번에 소개할 상징적인 거점은 드물다는 아쉬움이다.
필터 커피를 추출하는 앰버서더들. 한 잔을 완성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진다. 이지영 기자 [출처:중앙일보] 최근 커피 시장은 저가 커피의 대중화와 동시에 더 좋은 원두, 정교한 추출, 취향에 맞는 한 잔을 찾는 수요도 커지고 있다. 언페이지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대중화된 커피 시장의 반대편에서 지금 한국 스페셜티 커피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려는 시도다.
특히 안스타는 언페이지를 각 로스터리가 최고 수준일 때 어떤 맛을 내는지, 또 같은 원두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커피를 가볍게 즐기던 사람에게는 ‘이런 맛도 날 수 있구나’ 하는 순간이 남고, 이미 익숙한 사람에게는 한 잔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다시 보게 만든다.
코스 요리 먹듯, 커피도…해외서 먼저
해외에서는 이미 커피를 경험으로 소비하는 공간들이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의 코쿠운(Cokuun)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장소도 예약이 확정된 뒤에야 안내된다. 4명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서 90분 코스로 진행된다. 뉴욕 맨해튼의 워치하우스는 희귀 원두를 푸어오버로 선보이는 ‘레어리티즈’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가격은 메뉴에 따라 10달러 후반대부터 50달러 안팎까지 형성돼 있으며, 커피 맛은 물론 한 잔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과 설명까지 경험 요소로 내세운다.
각 로스터리의 원두가 놓여있는 원두 판매 진열장. 이지영 기자 [출처:중앙일보] 이들 공간은 대부분 ‘코스’라는 형식 안에서 커피 경험을 설계한다. 예약, 순서, 설명까지 구조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이어지는 방식이다. 해외에서 먼저 나타난 이런 변화는 국내 커피 시장에서도 감지된다. 커피 한 잔에 더 높은 완성도와 맛, 차별화된 가치를 찾는 소비가 늘고 있다.
가격보다 가치…비싼 한 잔, 통할까
동시에 국내 커피 시장에선 상반된 소비 흐름이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가 일상이 됐다. 빠르고 저렴하며, 어디서든 비슷한 만족을 주는 커피다. 다른 한쪽에서는 공간의 분위기와 설명, 추출 과정까지 포함한 한 잔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가 확산하고 있다.
그날의 날씨와 밖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통창. 이지영 기자 [출처:중앙일보] 일부 소비자들에게 커피는 더 이상 단순한 카페인이 아니다. 무엇을 마시느냐만큼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공간에서 마시는지도 중요해졌다. 가격표에는 원가만이 아니라 시간과 손길, 기획된 경험의 가치까지 함께 반영된다.
이 같은 흐름은 커피만의 현상이 아니다. 디저트와 위스키, 차(Tea) 등 일상 소비재 전반에서도 ‘만드는 방식이 보이는 브랜드’에 소비가 몰리고 있다. 상품 자체보다 기준과 취향, 경험에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가 확산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