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것입니다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토론토 중앙일보
오피니언 종교 칼럼 문제는 이것입니다
종교 칼럼

문제는 이것입니다

임재량 2026-04-16 0

선생님께서 칠판에 숫자 2, 4, 8을 쓰십니다. 그리고는 아무 설명 없이 그 숫자만 적어놓고 “답이 뭐냐”고 물으십니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듭니다. 누군가는 더하고, 누군가는 곱하고, 또 다른 학생은 수열이라고 대답합니다.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자신 있게 답을 내놓았지만,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정답이 틀려서가 아니라, 아무도 문제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실 안의 이 광경은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제게는 느껴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정답’을 찾느라 분주하게 보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계산하느라고 정작 하나님께 “문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일은 잊고 살아갑니다. 문제를 묻지 않은 채 정답을 찾아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살아온 삶의 방식입니다.


창세기는 그런 우리를 다시 삶의 본질로 데려갑니다. 인간의 문제는 내가 세운 목표와 현실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곧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그분을 대표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서 멀어진 상태가 진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오래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문제를 잘못 정의한 결과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던 두 나무는 이 문제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상징이고, 선악 지식의 나무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욕망을 비춥니다. 우리는 종종 ‘분별’이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분별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될 때,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독립의 선언이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선을 알아도 행할 힘이 없고, 악을 알아도 피할 능력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생명의 능력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정죄하고 비교하며, 내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인간의 비극은 무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이 ‘선악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참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다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인간의 타락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존재론적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채 스스로 버티려는 외로운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선악 지식의 나무 아래 서 있습니까.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아가지만, 정작 생명을 잃어버린 채 메말라가는 마음을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 상태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려 했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참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단지 죄를 용서받는 소식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얻는 소식입니다. 결국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가. 생명을 의지하는 자리인가, 아니면 판단과 독립의 자리인가. 온갖 종류의 2, 4, 8이 쓰여진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칠판 앞에 멈춰 서서 하나님께 문제를 다시 묻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언제나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그 분 자신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