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럽의 야심 찬 디지털 전환, 현실은 ‘사상 최악의 병목 현상’
유럽 여행의 설렘이 공항 검색대의 끝없는 줄 앞에서 분노로 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보안 강화와 효율성을 내걸고 전면 도입한 '신 출입국 시스템(EES)'이 시행 초기부터 심각한 운영 미숙을 드러내며 캐나다 여행객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기존의 여권 스탬프를 대신해 생체 정보를 등록하는 디지털 기록 방식이 도입됐지만, 현장에서는 기기 결함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대기 시간이 과거보다 수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비행기 놓칠 뻔했다"… 리스본부터 파리까지 이어진 아수라장
리스본 공항을 이용한 캐나다 영주권자 캐럴 페이비 씨는 최근 겪은 일을 '미로 속의 혼란'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생체 인식 키오스크 앞에서 거대한 병목 현상이 발생했지만, 이를 안내하는 직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고 전했다. 미국 여권을 사용한 그녀는 10대의 기기에서 20번 넘게 시도했음에도 인식이 되지 않아 결국 수동 심사대로 향해야 했다.
앨버타 출신의 마크 리슈먼 씨 가족 역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이륙 20분을 남겨두고 간신히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비행기 시간 2시간도 더 전에 도착했지만, 출국 심사 줄이 너무 길어 면세점은커녕 세금 환급조차 포기하고 게이트까지 질주해야 했다"며 "항공사 직원이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가족 모두가 낙오됐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기 고장에 전력 문제까지… 시스템 안정성 '낙제점'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을 이용한 온타리오 콜링우드 주민 더그 큐브 씨 부부는 "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열에 갇혔다"고 호소했다. 5명 중 1명꼴로 키오스크에서 승인이 거절되어 수동 심사로 다시 밀려나는 광경이 반복됐다는 증언이다. 오타와로 향하던 벤저민 애그니스 씨는 전력 문제로 시스템이 멈춰 서는 상황까지 목격하며, 기존 30분이면 충분했던 출입국 절차가 이제는 3시간 가까이 소요된다고 비판했다.
현재 EES는 아일랜드와 키프로스를 제외한 29개 셰겐 협약국(노르웨이, 스위스 등 비EU 회원국 포함)에서 시행 중이다. 유럽 위원회에 따르면 시스템 도입 이후 5,200만 건의 통행이 등록되었고 2만 7천 명의 입국이 거절되었으나, 정작 시스템의 처리 속도가 여행객들의 유입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디지털 효율성이라는 허울에 갇힌 여행객의 권리"
기술의 진보가 항상 편리함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유럽 EES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안을 위해 생체 정보를 수집하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충분한 기기 보급과 현장 인력 배치 없이 시스템부터 도입한 결과는 고스란히 여행객들의 시간적·금전적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기기 오류로 인해 결국 사람이 직접 여권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디지털 전환의 본질적인 목적마저 퇴색시킨다.
캐나다 여행객들에게 유럽은 가장 선호되는 관광지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항에서 3시간씩 발이 묶이고 비행기 탑승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유럽 관광 산업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일 수밖에 없다. 유럽 당국은 '2.7만 명의 입국 거절 성과'를 자랑하기에 앞서, 무고한 여행객들이 키오스크 앞에서 겪는 공포와 불편을 해결할 실질적인 인프라 개선에 나서야 한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로 당분간 유럽행을 계획 중인 독자라면, 공항 도착 시간을 평소보다 훨씬 넉넉히 잡는 '최악의 시나리오' 대비가 필수적이다.
토론토 중앙일보 편집팀 (news@koreadailytoronto.com)